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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교육자료 (4) 홍해, 사해, 마사다

평화 강명옥 2009. 1. 10.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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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

- ‘홍해’라는 이름은 옛날 그 근처에 살던 동색 인종에서 시작되었거나 홍해가의 빛나는 암석과 바다 밑에 빛나는 여러 가지 침전물들 때문에 물빛이 붉은 까닭에서 유래되었다고 함

- 홍해는 인도양에서 수에즈 만 까지 2,160km나 되는 해만인데 깊이는 3,400m 이상 넓이는 200m 이상

- 서쪽으로는 애굽, 구스, 분투가 있고, 동쪽으로는 아라비아 반도에 접경

- 히브리어로는 ‘얌 숩’으로 ‘갈대의 바다’를 뜻함

- 홍해의 위치로는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갈라졌던 애굽 바다, 또는 수에즈 만, 혹은 아카바 만으로 추정

- 30m 바다 속까지 들여다보일 만큼 깨끗해 투명한 초록 빛깔의 물



사해

예루살렘 동쪽으로 약 35km를 가면 사해의 북단에 도착하게 된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사해까지 직선거리는 매우 가까워 감람산 정상에서 사해를 내려다 볼 수도 있다. 사해는 해면보다 398m나 아래에 있어 지표로는 지구에서 가장 낮은 지점이다.

사해를 히브리어로는 ‘소금바다’(염해)라는 뜻으로 ‘얌 하멜라흐’라고 하는데(창 14:3), 사해 주변 언덕의 돌에서 소금을 캐내어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고, 지금도 유목민들은 원시적인 방법으로 사해에서 소금을 얻어 쓰고 있다. 그러나 사해는 바다가 아니라 깊은 곳의 수심은 수면에서 약 400m까지 내려가며, 둘레의 길이가 200km이고, 넓은 부분의 폭이 18km, 넓이는 약 1,015km2인 큰 호수이다. 사해는 연중 기온의 변화가 별로 없어 고온이 계속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섭씨 40도는 보통이다. 사해는 갈릴리 바다에서 흘러내려 오는 요단강과 사해 주위에 있는 와디로부터 매일 평균 500만 톤의 물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사해는 물이 들어오기만 하지 나가는 곳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해의 물은 넘치지 않고 일정한 수위를 유지한다. 이 지역의 기온이 워낙 높아서 들어오는 양만큼의 물이 계속 증발하기 때문이다. 사해 표면에서 여름날 하루 동안 증발하는 물의 양은 대충 25cm 두께로 생각한다.

사해의 물은 여러 가지 무기질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그 농도가 약 30%로 보통 바닷물 농도의 7배가 되므로 사람이 물에 들어가면 가라앉지 않고 뜨게 된다. 그래서 사해의 물은 뿌옇고, 비눗물처럼 미끈거린다. 이 물을 그릇에 담아 증발시키면, 잔유물들이 그릇의 1/4를 채운다. 사해는 남쪽 부분이 북쪽보다 그 농도가 높아서 색이 더 푸르고 아름다우며 소금기둥도 볼 수 있다. 오늘날 이곳은 성지순례자들이 몸을 담그는 관광지가 됐지만, 예전 사람들은 물고기조차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이름도 사해(死海)였다.



마사다

이곳은 원래 주민들이 에스세베(Es-Sebbe)라 불렀던 거대한 암석 산으로 천연 요새이다. 위치는 사해 서안의 유대광야 동편에 있으며, 키르벳 쿰란에서 남쪽으로 약 80km떨어진 지점에 있다. 마사다의 상부 고원은 마름모꼴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면적은 약 44,500평에 이른다. 또 가파르게 솟아 있는 주위의 급경사의 높이는 400m가 되는 곳도 있다.

하스몬가의 대제사장 요나단 마카비(주전 161-142년)는 마사다의 이러한 천연적 산악 이점을 잘 알고 이를 요새화하였다. 헤롯 대왕은 유대에서 세력 다툼을 하며 여러 해 동안 전쟁을 할 때, 자신의 가족의 피난처로 이 마사다를 택하였다. 주전 37년 헤롯 대왕이 유대의 통치자가 되자 이 요새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 성을 강화했다.

주전 4년 헤롯 대왕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아켈라오가 주후 6년에 로마 제국으로부터 파면을 당해 유배를 간 후, 마사다 요새는 로마의 작은 수비대가 거하는 주둔지가 되었다. 그로부터 60년 후인 주후 66년에 열심당원(Zealots)의 무리가 로마군을 습격하여 이를 빼앗고, 그곳 무기창고에서 무기를 당원 모두에게 분배하여 예루살렘의 로마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주후 70년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로마군에게 함락당한 뒤에도 마지막까지 마사다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은 플라비우스 실바(Flavius Silva)가 이끄는 로마 10 군단과 2년간 길고 외로운 항전을 하였다. 로마군은 주후 72년 가을과 73년 봄 동안 총 공격하였는데, 중병기를 총동원하여 서편 성벽 일부를 파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항전하는 열심당은 이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여 대항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공격해 오는 로마군에 살아남을 희망마저 잃게 되자 그들의 지도자인 엘레아살 벤 야일(Eleazar Ben Yair)의 주장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했다.

이들은 남녀 어른들과 어린이를 합하여 모두 960명이었다. 그들은 로마군에 잡혀 노예가 되는 것보다 자유의 몸으로 기꺼이 죽음의 길을 택하였다. 다음날 로마군이 마사다 성 안으로 들어갔을 때 2명의 여인과 5명의 어린이 밖에 생존자가 없었으며, 성내의 모든 것은 불타버리고 없었다. 마사다 주변에는 지금도 당시 로마군 공성용 참호 유적이 생생하게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지금도 이곳은 유대 민족이 당시 막강한 로마군과 항쟁한 탁월한 민족 항쟁 유적지 가운데 하나이다.

- 사해 남쪽의 나바티아인과 사해 동쪽의 리산 반도로 건너오는 모압인을 방어하고 유사시에 피난처로 삼기 위해 건설

- 헤롯은 유사시를 대비해 주전 36년부터 30년에 걸쳐 이중 성벽, 층의 호화스런 궁전을 짓고 이곳을 요새화함

- 정상은 평탄하며 남북 길이가 570m, 동서 폭이 350m, 높이 445m

- 산정에는 약 90m 파내려간 거대한 저수조 12개, 로마식 대욕장, 제의용 목욕장, 수영장, 사우나탕, 올리브유, 포도주, 종려나무 열매 등을 저장하는 큰 식량 창고가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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