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이야기

이 길 외에 어떤 길을 가겠습니까? 신학생 컨퍼런스에서 이재철 목사와 참석자들이 눈물 쏟은 사연

평화 강명옥 2013. 12. 16.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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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점과 해결 방안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는군요.

기사를 읽고나서 참 감사하다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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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 외에 어떤 길을 가겠습니까?"
신학생 컨퍼런스에서 이재철 목사와 참석자들이 눈물 쏟은 사연
2011년 08월 15일 (월) 18:37:56 김성회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 grassroot 

"목사님,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합니까?" 신학생 멘토링 컨퍼런스 둘째 날인 8월 9일, 스무 명 남짓한 교인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해 목회하고 있다는 한 참가자는 질문과 함께 눈물을 쏟았다. 이재철 목사의 책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었다는 그는 책을 대할 때마다 행복했지만, 정작 그렇게 살 자신이 없었기에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했다. “십자가가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겠나"는 물음과 함께.

이재철 목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허랑방탕한 알코올중독자에 도박 중독자였습니다. 마리화나에도 손을 대었습니다.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저는 도저히 목사가 될 수 없는 무자격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보혈로 저를 구원해주셨을 뿐 아니라, 저를 당신의 종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탕감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살수밖에 없고, 죽도록 그분께 충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석자의 질문에 대답하던 이재철 목사의 목소리도 떨리기 시작했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이재철 목사는 눈물을 닦으며 질문을 한 참가자에게 "우리 목회의 동기와 출발점이 내가 아니고 그분이 된다고 하면 이렇게 까지라도 해야 하냐고 물을 것이 아니라, 이 길 외에 어떤 길을 가겠습니까 하고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참된 목회자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목회 초년생의 절규에 이재철 목사는 쉽게 꺼내놓기 쉽지 않은 지나온 삶의 질곡을 조심스럽게 공개했다. 자신의 고백을 통해 한 젊은 목회자가 평생 참된 목회자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기를 위한 마음에서였다.

   
 
  ▲ 이재철 목사.  
 
강의 형식이 아닌 질의응답이 오고가는 현장의 분위기를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모한 일이기도 하다. 내용보다 더 중요한 정황을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내용을 옮긴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학생 멘토링 컨퍼런스의 현장은 멘티들의 영적인 고뇌와 멘토들의 따뜻한 위무가 함께하는 자리였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다음은 이재철 목사의 두 번째 강의 때 오고갔던 내용들이다.

참가자 / 예전에 스님과 신부를 모셔서 강의를 열었다고 들었다. 아이들에게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뉴에이지 사상과 다원주의가 강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를 뛰어넘는 감염이 들어오면 안 된다는 우려가 있는데 이런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이재철 목사 / 스님과 신부가 독신으로 산다. 그렇다고 개신교 목사가 스님과 신부가 추구하는 구도의 정신보다 엷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님도 사귀어보고 신부님도 사귀어보라고 진심으로 당부한다. 구도자가 어떤 중심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도'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일종의 '도'를 쫓는 구도자다. 한국의 유명한 사찰의 스님들이 기거하는 곳을 담 너머로 들여다보면 고무신들이 자로 잰 듯 가지런하게 놓여있고, 아무개 신부의 책상 위에는 비뚤어진 것이 없다.

내가 도를 추구하면 내 주위가 저절로 정돈된다. 목사들이 식당에 가면 구두를 꼭 남이 정리해줘야 한다. 우리 교역자에게 해주는 말이 있다. 교인들은 목사가 하는 말에 감동 받지 않는다. 목사가 떠난 책상을 보고 감동 받는다. 밥알을 지저분하게 남기지 마라. 책상을 깨끗하게 정리해라. 

우리 구도의 정신은 신부, 스님 이상으로 철저해야 한다. 독신이 아닌 이상 가족이 함께 결단해야 한다. 아이들 키우면서 목사의 아들이 아니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도록 노력하고 있다. 내가 목사로 살기로 결단했기 때문에 내 아내와 아이들도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면 권위는 저절로 생겨난다. 함께 목회하고 살아가는 교인들에 의해서 권위는 생겨난다. 사람들이 목사를 신뢰한다. 

목회자는 경제적인 자립이 되어야한다. 그것은 자기가 필요한 만큼의 돈을 스스로 벌어들일 수 있는 능력이 아니고 자기에게 주어진 경제적 상황에 자기를 맞출 수 있는 능력이다. 그 상황에 나를 맞출 줄 아는 것, 물질로부터 초월하는 것 그 이후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고 바울은 말한다. 100주년기념교회에서 415만 원 봉급을 받는다. 세금을 떼고 나면 약 370만 원 정도를 받는다. 내 아내가 홍성사를 경영하면서 약 300만 원 받는다. 거기에서 십일조한다. 판공비는 따로 없다. 내가 쓴 책이 상당히 많이 나갔다. 그 인세가 1 억이 모였을 때, 홍성사가 조그마한 창고를 지어야 해서 그 돈을 다 줬다. 또 인세가 5,000만 원 모였을 때 홍성사 직원들이 다 같이 홍성사 문을 닫고 터키 성지 순례를 다녀왔다. 

내가 주님의교회를 퇴임했을 때, 교회에서 나에게 예우를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냐고 물어왔다. 주님의교회에서 몇 억 받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하지만 정말 타락했던 나를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나를 구하셔서 내가 주님의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내가 월급을 받는 고용인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는 교인들과 더불어 사는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퇴직금을 준다고 해서 사양했다. 재정 장로가 목사님이 퇴직금을 받지 않으면 후임자들이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문제 제기를 했는데, 일리가 있는 지적이었다. 그래서 법적 퇴직금만 달라고 했다. 퇴임할 때 한 달 봉급이 220만 원이었는데 열 달치인 2,000만 원을 퇴직금으로 받았고, 그 돈은 정신여고 건축 기금으로 다 냈다. 

내 처와 나는 돈을 모으는 통장을 가지지 않고 우리 명의 집을 가지지 않기로 하나님께 서원하고 살고 있다. 늙어서 어떻게 살겠는가라는 질문에 어제 셰퍼 박사와 대천덕 신부 이야기를 하면서 나왔었는데, 두 분이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한 분은 알프스 산 속에서 한 분은 강원도 황지 산 속에서 계시는데 그분들이 살아생전에 단 한 번도 굶은 적이 없다고 했다.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 셰퍼 박사의 경우 어느 날은 살림 사는 집사가 와서 내일 먹을 것 없다고 했다. 새벽이 되니 사람들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청년들이 들어오는데 청년들 어깨에 빵, 버터, 과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평소 아침 식사 시간에 도착했다고 한다. 어디서 왔냐고 물으니 영국 런던에서 왔다고 했다. 몇 달 전부터 준비해서 어제 영국에서 출발했다고 했다. 셰퍼 박사에게는 그것이 그냥 빵이 아니었다. 주님께서 셰퍼 박사에게 빵을 주기 위해서 몇 달 전부터 영국 청년들을 감동시키고 비행기를 태워서 모든 것을 시간을 맞춰 오지 않았나.

나도 그런 리듬으로 살려고 애쓰고 있다. 목회자가 큰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노후 걱정을 하고, 자기가 사랑하는 교인들에게 퇴직금으로 몇 억 내라고 하며 한국에서 요즘 싸움이 자주 벌어지지 않나. 우리가 정말 물질에서부터 자유하는 이 믿음, 내가 내 기득권을 포기하고도 걸어갈 수 있는 리듬으로 간다면 내게 예금 통장이 하나 없어도 하나님께서 내 노후 대책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참가자 / 내가 칭찬하면 하나님 칭찬을 가로채는 것은 아닌가, 칭찬은 어디까지 해야하는가?

이재철 목사 / 내가 주님의교회에서 목회할 때, 어떤 여집사가 새벽 기도가 끝나면 아무도 모르게 타월을 갈았다. 아무도 모르게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는 자리에 주님의 터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목회자의 칭찬과 사람의 칭찬이 얼마나 공허한지 알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하시는데 저 분만이 즐기는 하나님의 교류를 방해하지 말자며 새벽 기도 끝나고 바로 화장실을 가지 않았다.

헌금 봉투에 이름 안 쓰는 것도 그래서 시작한 일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일 원이든 만 원이든 내가 내서 하나님께 오는 위로를 내가 받으면 세상 사람들의 스포트라이트가 아무 소용없게 된다. 

우리가 아이를 키우는 데 단계가 있다. 교인들 중에는 어깨를 쓰다듬어야 할 교인도 있고 내가 말로 칭찬해야 할 교인도 있고 한 번 툭 쳐야 할 교인도 있다. 그러나 평생을 교인이 목회자의 칭찬의 틀 속에 갇혀 있게 하면 안 된다. 주님의 손길을 바로 느낄 수 있도록 통로가 되어주는 것이 목회자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참가자 / 100주년기념교회의 직분 호칭, 제도 문제에 대해 직접 들어보고 싶다.

호칭 제도는 잘 아시리라 생각한다.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제네바에서 칼뱅이 개혁을 했다. 칼뱅이 개혁을 할 때 칼뱅은 장로교회라는 이름으로 만들지 않았다. 칼뱅은 개혁 교회(reformed church)를 시작했다. 교황 일인 치하의 교회를 개혁(reform)하는 교회를 만든 것이었다. 교인들의 뜻을 대의하는 장로들을 뽑아서 대의정치를 하게 한 것이다. 

우리가 교회를 개혁하는데 내가 제네바에서 하는 시스템을 따를 필요가 없다. 현지의 시스템에 맞추라고 칼뱅이 말했다. 그 모든 교회의 이름은 개혁 교회(reformed church)다. 칼뱅의 개혁 정신을 살리는 교회다.

교인들이 선출한 장로가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장로를 하는 것이 미국의 정서에 맞지 않아 미국의 장로교회는 직능의 의미로 장로를 삼았다. 20대 장로는 20대를 대표하는 직능 대표로 뽑히는 것이었다.

이 장로교가 한국의 유교적 가부장 제도와 결합하면서 변형됐다. 지난 1~20년 동안 장로 제도에서 그치지 않고 장로에 필적하는 직분을 주기 위해 세계 유일의 권사 제도를 만들었다. 이 직분 제도가 한국의 교회를 부흥하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100년을 지나오면서 장로, 권사가 계급화되고 서열화되면서 교회의 문제점이 된 것이 실상이다.

그래서 봉사자인 장로, 권사 투표를 하는 데 돈을 쓰지 않나. 교회에 따라서 차량 안내를 해라, 성가대 대장을 해라하는 식의 장로 잘 뽑히는 부서가 있다. 오늘날 한인 교회는 어떤가? 장로, 권사 안 주면 교회를 떠나지 않나. 장로, 권사라고 하는 제도가 변질된 것이다. 

한국 교회의 장로, 권사 제도가 큰 기여는 했지만 지금은 부작용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바꿔 입어야 할 백년 된 옷을 바꾸지는 않는다. 장로를 뽑아야 임직예배할 때 헌금을 할 것이고, 그게 교회 재정이 도움이 되니, 이런 악순환이 반복된다. 감리교는 본래 장로가 없지만 한국에는 있지 않나. 침례교도 마찬가진데, 호칭 장로가 재작년 통과됐다고 들었다. 다른 교단과 일할 때 다른 교단은 다 장로가 나오는데 자기들만 집사가 나오면 차이가 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걸 보면 장로 제도가 철저한 계급제가 되었다고 봐야한다.

처음 주님의교회에 가면서 나는 10년, 장로는 13년으로 임기를 정했다. 내가 퇴임하고 나서 장로들이 인수인계해야하니 3년을 보탠 것이다. 장로, 권사, 집사는 임기 끝나면 백의종군하는 것으로 법을 바꿨다. 이러한 결정 이후에 다른 교회에도 임기 정하고 신임 투표하는 무브먼트가 있었다. 

2005년부터 목회한 100주년기념교회는 20개 교회와 26개 교회 기관이 연관돼 있는 초교파 교회였다. 교회는 모든 교파를 어우르는 연합교회지만 제도적으로 어느 한 교회의 헌법을 따르는 일은 없는 독립교회로 존재했다. 이런 초교파적인 교회라면 한국 교회에선 언젠간 고쳐져야 하는 장로, 권사의 폐습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해 제도를 바꾸자고 했다. 장로, 권사가 서열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호칭제로 하자고 제안했다. 아무리 믿음이 뛰어나더라도 돈이 없으면 장로가 될 수 없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기 때문에 일정한 기준을 두고 호칭제 장로를 두자고 했다.

막상 시행되자 우리 교인이 늘어나다 보니 우리 교회가 마구 장로, 권사를 세우기 때문에 교인이 늘어난다는 이야기가 도는 등 여러 가지로 역풍을 맞았다. 나는 언젠가는 반드시 바뀌어져야 할 것이라고 본다. 20~30년 후가 되면 현재와 같은 장로, 권사 제도는 바뀌어 질 것이라고 본다. 첫 번째 발판을 까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다.

참가자 /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영어 성경에 맨 앞에 사도신경에 보면 descended into hell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글 사도신경에는 이것이 없다. 모든 교회가 이것을 신앙으로 고백한다. 그 구절을 임의로 삭제하고 신앙고백하는 나라는 유일하게 우리나라밖에 없다.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구설수에 오르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다. 

이 구절이 빠지게 된 정황은 아무도 모르지만 추정할 수 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와서 번역했던 초기 사도신경에는 이 구절이 들어있다. 천주교, 성공회에는 들어있다. 그런데 1905년인가 언제인가 각 교단 선교사들이 각 교단별로 찬송가를 가지고 있다가 통합 버전을 만들기로 했는데 한 교단의 선교사가 그 부분에 반대 의견을 냈다. 한 찬송가를 만드는 조건으로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시고' 이 부분을 빼자고 주장했다. 그 찬송가에서부터 빠져있는 것을 보고 추정할 수 있다. 

한기총에서 2년 전에 NCC 와 같이 주님의 기도와 사도신경을 재번역했는데 거기에 보면 각주를 달았다. '대부분의 사본에 없었다'는 말이 첨가됐다. 한국의 대부분 사본에 없다는 말이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사도신경을 가르칠 때, 누군가가 젊은 선교사가 의도적으로 뺀 불완전한 사도신경을 그대로 가르치겠는가? 원문을 가르쳐야한다고 생각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지옥에 내려가서 그 곳에서부터 천국에 가셨다고 나와 있다. 그래서 천상, 지상, 음부가 예수님의 힘이 모두 미치게 되는 것이다. 나도 신학교에 가서 사도신경 원문에 그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우리는 라틴어 원문으로 교인들에게 사도신경 강해를 했다. 

예수 안 믿고 지옥에 간 사람 예배를 드려줄 수 없다는 목사의 이야기를 봤다. 지금 내 남편이 예수 믿지 않고 교통사고로 죽은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그 장례식을 집전하지도 않고 기도도 안 해준다면 예수님의 은혜는 무엇인가 생각해봐야 한다. 

모 기관지에 어떤 사람의 질문에 대해서 상담한 글을 읽었다. 자매가 교수에게 질문했는데 동생이 예수 안 믿고 죽었다. 눈만 감으면 동생을 위해 뭔가 기도를 해주고 싶었다. 내가 죽은 동생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냐는 질문이었다. 이에 안성모 교수는 목회적 차원에서 대답했다. 초대 교회, 가톨릭의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이야기하면서 신학적으로 옳고 그름을 떠나 목회적 차원에서 기도한다고 답변한 것이다. 그 글을 읽고 나는 안 교수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딱 한 줄 썼다. 단서를 달았다. 구원은 전적으로 주님의 몫이니 구원의 여부는 우리가 이야기는 할 수 없다고 했다.

그 구절을 가지고 이재철 목사가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결국 그분들이 역풍을 맞고 그들이 그런 비방을 중단했다.

김영봉 목사 / 이번 주 설교 준비하면서 똑같은 이야기가 나와 말씀드리는데, 미국 사람이 새 도시로 이사 가서 교회를 찾는데 마땅한 곳이 없었다. 장례식에 참여를 했는데 그런데 집례하는 목사님이 이 사람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지옥에 갔습니다. 여러분들도 지옥에 가지 않도록 예수님 영접하라고 이야기 했다고 했다. 장례식을 마치고 가면서 남편이 아내에게 이야기 했다. "이렇게 용기 있는 목사라면 이 교회에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을 용기있다고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분별력이 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나는 코마상태에 빠져있는 사람조차 영혼으로는 하나님과 교통한다고 믿기 때문에 입으로 고백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분과 하나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우리로서는 그분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 사람이 예수를 영접 못하고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 관계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그런데 교리적 판단, 잣대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 이재철 목사.  
 

참석자 / 오늘 날 시대가 말씀의 시대다. 그런 말씀이 소비되는 시대. 클릭 한 번이면 대한민국 명 설교가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는데, 나 역시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큰 깨달음을 얻는다. 그걸 나누기도 한다. 스무 명의 성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는 나는 어떤 자리 매김으로 해야 하는지, 그렇게 좋은 설교를 다 들을 수 있는데, 내가 말씀을 전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들에게 담임 목사로서 이 말씀의 홍수에 시대에 무엇을 전해야하는지 알고 싶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하는가. 목사님의 책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을 때 마다 참 좋고 행복했다. 항상 그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며 눈물이 난다. 나는 그렇게 살 자신이 없다. 십자가가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겠나. 

이재철 목사 / 참가자께서 말씀하신 "왜 그렇게까지 해서 사는가" 하고 물었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 분께서 살려주셨기 때문이다. 난 대학교를 졸업하고 외국인 회사에 있다가 사업을 시작해서 큰 돈을 벌었다. 20대에 큰돈을 벌었으니 내 주위에 얼마나 많은 중매쟁이들이 있었겠는가. 50번도 넘게 중매를 봤다. 그러던 중 한 번 파혼의 아픔을 겪은 여성분을 만나게 됐는데 이 분과 결혼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내가 스물일곱 살 되던 삼월 하순에 결혼했다. 결혼하고 2주 만에 아내가 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가진 돈으로 2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썼다. 심지어는 외국에서 사람을 불러오기도 했고, 전국의 기도원도 다 돌아다녔다. 하지만 결국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홀아비가 되어서 장례식에서 뼈를 뿌리면서내 마음속으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나 이제 당신을 안 믿겠다. 당신 말씀을 통해 뭐라고 했는가. 이 세상의 어떤 부모가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나. 내가 당신에게 떡 달라고 했나, 내가 생선 달라고 했나, 당신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생명, 결혼한 지 2주 만에 암 환자 판명난 이 생명 구해달라고 했는데 생명 거두어갔다. 나도 당신 안 믿겠다"라고 결심하고 집에 갔다. 

집에 가서 오후 3시에 침대에 누웠다. 왼쪽 창문에서 햇볕이 들어오는데, 처음 보는 빛이었다. 그때 마치 타자기가 활자를 칠 때 나는 소리와 함께한 글자씩 보이는 듯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않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죽어도 영혼이 죽지아니하리니."성경도 제대로 읽지 않을 때였기에 그런 구절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지만, 나는 버리지만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를 잃은 아픔은 가시지 않았고, 마리화나에 손을 댈 만큼 정말 형편없이 살았다. 하지만 그런 만큼 주일에는 더 열심히 봉사했다. 그게 면죄부였던 셈이다. 주일날 봉사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중략>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몇 번 만나고 나서 아내에게 "나는 당신의 결혼 상대가 될 수 없다, 나는 결혼해서는 안 될 7가지 이유가 있다. 결혼도 해본 사람이고, 나는 술꾼이고, 나는 당신만큼 세상의 학력도 좋지 않고, 지금 하고 있는 사업도 부도가 났다"는 등의 이유를 댔다. 당신 같이 훌륭한 사람은 정말 좋은 남편 만나라고 했다. 만약에 그저 내가 그 사람을 보고 이 사람 괜찮으니까 내 사람 만들어야지 했으면 깨졌을 것이다.

이 사람이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눈물을 흘리고 한 마디를 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래서 나와 결혼했다. 그런데 내 삶의 습관이 어디 가겠나. 결혼하고 늘 술 먹고 새벽 2시에 들어갔는데 아내가 나를 기다리다 엎드려 잠이 들어있는데 머리맡에 일기장이 있었다. 지금도 내 아내의 서랍을 열어보지 않는다. 그런데 그 때 이상하게 그 일기장을 한 번 봐야할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 일기장에 눈물 자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난 오늘도 하염없이 논길을 걸었다. 그리고 죽음을 생각했다. 손목을 그을까, 약을 먹을까"는 내용의 고민을 쓰다가 "아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남편인데. 내가 믿어야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내 처는 술독에 빠져 있는 나에게 싫은 소리를 한 번도 안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내가 방탕한 삶을 살아도 이 사람은 뭘 모르는구나 하고 여겼다. 그런데 그 일기장을 보면서 나 때문에 죽음까지 생각하면서도 예수 때문에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예수님의 사랑을 그렇게 수없이 들었는데, 그 사랑은 단지 책 속의 사랑이요, 전설 속의 사랑이었을 뿐 그런 사랑을 누구도 보여준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사랑을 내 아내의 일기장을 통해 확인했던 것이다.

그 순간에 난 술이 머리끝까지 취해 있었지만 성령을 만났다. 그 날 내 인생이 바뀌었다. 내가 밤새도록 지나온 과거를 보면서 잘못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고 아침에 일어나서 '내가 내 인생길을 바꾸어야겠다. 그냥 있으면 또 이 인생을 답습할 것이기 때문에 인생길을 바꿔야겠다'라고 다짐했다. 내 인생길을 바꿔야겠다고 아내에게 이야기했더니 아내가 "고맙다. 이런 날을 기다렸다"고 했다.

그리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사람들이 나에게 교회(주님의교회)를 개척하자고 제안해서 그 교인들에게도 나의 지나온 삶을 다 이야기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 주님의교회를 시작했다. 

나는 허랑방탕한 알코올중독자에 도박중독자였다. 마리화나에도 손을 대었다.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나는 도저히 목사가 될 수 없는 무자격자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보혈로 나를 구원해주셨을 뿐 아니라, 나를 당신의 종으로 세워주셨다. 주님께서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고, 죽도록 그분께 충성할 수밖에 없다. (눈물) 

그렇기 때문에 내 의지나 내 노력이나 내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하지 않는다. 그 분이 나를 살려주셨고, 내가 그 분에게 내 삶을 드릴 때, 그 분이 내 아이들, 내 삶을 책임져 주시는 것을 매일 매일 확인하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 이 이상 최선의 길이 없다.

질문한 분은 나와 다른 인생을 살았지만 정말 예수님의 보혈이 죽음에서 나를 살렸다고 생각한다면 그 은혜의 무게는 당신이나 나나 똑같지 않겠나. 우리 목회의 동기와 출발점이 내가 아니고 그 분이 된다고 하면 이렇게까지라도 해야합니까가 아니라 이 길 외에 어떤 길을 가겠습니까 하고 물어야 한다.

초대 교부 폴리캅이 예수를 부인하지 않으면 화형 시키겠다고 협박당했을 때, '그 분이 내 평생에 예수가 나를 배신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예수를 배신하겠느냐'고 화형길로 가지 않았나. 내 평생에 배신하지 않았던 그분이었기 때문에 그분이 내가 불타 죽은 이후를 책임져주지 않겠냐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참가자 / 목회를 하다보면 여러 가지 유혹을 만나게 되는데, 그런 것들을 극복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이재철 목사 / 신학교를 가기 전에 사람이 누려볼 수 있는 것들을 누려볼 수 있었다. 20대 때 벌써 한국에서 가장 큰 아파트에서 살고 벤츠 탔다. 내가 주님을 만났을 때 그것이 얼마나 어이없고 허망한 일인지 잘 알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티끌만큼도 미련이 없다. 

여러분들의 교회가 커지면 여러분을 사랑하는 장로나 교회의 교인들이 여러 가지 제의를 할 것이다. "목사님, 우리 교회 규모면 기사도 있어야하고 차도 있어야 합니다." 나는 다 해봤고 그것이 주님의 몸된 종으로서는 취할 길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기 때문에 유혹이 전혀 없다.

주님의교회가 상담 전화를 개설했을 때 지금은 큰 교회들이 많이 하지만 그땐 교회로는 처음이었다. 소문이 나면서 전국에서 상담 전화가 왔는데 그 상담원들이 자기들이 할 수 없는 내용은 나한테 넘겨줬다. 대부분은 목회자의 사모들이었다. 목사 사모 고민의 대부분은 부부 관계다. 남편이 사랑하지 않는 것이었다. 남편이 여자 교인들과 불륜을 저지르거나 하는 경우다. 이런 전화를 부지기수로 받았다. 

내가 이렇게 말했다. "사모님은 목사님이 들어오실 때 여성으로서 남편을 맞는가, 자기 자신을 한 남자의 아내로서 가꾸어 가는가. 내가 가꾸지 않고 내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빠지는가, 목사는 하루 종일 여자들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

내 처가 집에서 단순히 목사의 아내의 역할만 할 뿐 한 남자의 아내로 여성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죄성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여자한테 시선이 가지 않겠는가. 그런데 내 처가 나한테 참 잘해준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볼 필요도 없고, 내 처보다 더 나은 다른 사람을 볼 수도 없다. 그래서 난 내 처와 영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이 문제도 나한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 김영봉 목사와 이재철 목사.  
 
김영봉 목사 / 책에서도 읽을 수 없는 속 이야기였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상처 이야기, 아픈 이야기를 들을 때 더 큰 감동을 받게 되는 것 같다. 더군다나 이렇게 우리가 겉모습만 보고, '어떤 사람은 저렇게 귀족처럼 생기게 만드시고 어떤 사람은 머슴처럼 만들어 놓으셨나' 하고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투덜거릴 일이 아니다(웃음).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분의 아픔의 이야기가 훨씬 더 강하게 우리에게 와 닿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참가자 / 여성 사역자로서 부르심에 따라 살기에 이 현실이 척박하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성경에 보면 여성은 가르치지 못한다고 나와 있다고 말하는 목회자들이 있다. 그러면 여자 전도사들 교육부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전도사들이 애들에게 설교하는 것은 괜찮고 공식 석상에서는 왜 안 되나.

각 개인에게 주신 부르심, 소명에 대한 반응을 했을 때 여자와 남자로 구분 짓는 현실이 답답하다. 교회 안에서 머물 수 없으니 여성 사역자들은 선교사로 다른 단체로 간다. 왜 이재철, 김영봉 목사 자리에 여성 사역자는 없을까.

이재철 목사 /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형상을 따라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 하나님 형상이 남자면 남자만 만들었을 것이고 여성이면 여자만 만들었을 텐데 당신의 형상을 따라서 여자와 남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에는 여성성과 남성성이 다 있다고 본다. 교회에도 여성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하다. 목회자도 있어야하고 장로도 있어야 한다. 우리 교단에서 여성 안수가 통과됐을 때 그 해에 여전도사를 안수 받게 했다. 그러나 여성 교역자들이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남자들도 마찬가지지만 난 늘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목회를 해야한다는 점이다.

여성 교역자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현실적으로 결혼하면 애 낳고 키워야하는데 남성 교역자처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똑같이 할 수 있는가? 그것 할 수 없다면 여성 교역자들의 일은 결국 제약적이지 않은가. 우리 교회의 여성 목사는 독신이다. 그 분은 다른 남자 교역자들과 조금도 구별하지 않는다. 그 목사는 우리 교회에 두 번째로 빨리 들어와서 봉급도 두 번째로 많이 받고 있다. 일을 맡기거나 역할에 전혀 차이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결혼하고, 아이 키우고 이런 것들을 다 하면서 "남자 교역자 같은 자리를 다오"라고 하는 것은 남자가 그 자리에 있을 때 더 하나님의 유익이 있지 않겠는가. 이 부분을 여성 목회자들이 꼭 생각해야 될 부분이다.

참가자 / 목회자로서 비전에 대해 말해 달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야망이나 꿈을 비전이라고 포장한다. 어떤 가시적인 결과는 나오지만 후유증이 남을 때가 더 많다. 내가 <비전의 사람>에서 말했듯 비전은 나의 비전이 아니고, 가령 나를 예로 든다면 수렁에 빠져있던 불쌍한 이재철이라는 한 인간을 정애주라는 한 여인을 통해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나를 구원하셨다면, 나를 통해서 이루실 그 분의 비전을 따져야 하는 것이다. 

비전은 나를 통해서 이루실 그분의 비전에 내가 동참하는 것이다. 그럼 그 비전을 어떻게 아는가? 이것은 기도원에서 아는 것도 아니고 책상 앞에서 아는 것도 아니고 나의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아는 것이다. 그래서 비전의 사람들의 인생은 모자이크 판과 같은 것이다. 내가 내일 무엇이 될 지 모르지만 오늘 주어진 현실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고 열심히 한 장씩 색종이를 붙이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다마섹에서 주님을 만난 다음에 13년 동안 다소에서 칩거하고 1년 동안 안디옥에서 목회하다가 선교사로 파송된 뒤 근 20여 년이 지났을 때, 에베소에서 열심히 살아온 자기 인생의 모자이크 판을 보고 "아! 로마구나, 내 생을 던질 곳이 로마구나"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청년 집회에 가면 로마의 비전을 받은 바울처럼 아프리카 비전 받을래, 남미 비전 받을래 하고 말한다. 그러니까 선교지마다 문제투성이다. 그건 내 비전이지 하나님의 비전이라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열심히 모자이크 판을 붙이다 보면 어느 날 그것이 보이는 것이다. 

어제 말했던 것처럼 아무도 안 부르는 주님의교회와 제네바한인교회를 간 것도 주님의 비전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열심히 매일 매일 살았다. 그랬더니 20년 동안 자립되지 못했던 교회가 이제 자립을 해서 지금은 다른 교회를 돕는 교회가 됐다. 내가 떠난 지 10년 됐는데 아직도 그렇게 잘 하고 있다. 비전은 내가 내 것을 찾아서 이루려고 하며 꼭 인간적인 방법을 강구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비전을 단 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내 생을 던지면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다. 

참가자 / 목사의 가정, 사모의 역할에 대해 말해달라.

이재철 목사 / 목사의 가정은 모든 사람이 들여다보는 투명한 유리가 끼워져 있는 쇼윈도가 되어야한다. 내 자식들은 목사가 아니기 때문에 내 자식은 세상대로 키우겠다고 하면 구도의 길을 우리가 걸을 수 없다. 두 말할 것도 없이 목사는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어야 하고 자식에게 좋은 아버지여야 한다.

첫 째는 부부는 영촌이라고 했다. 영촌의 거리를 존중하라. 남편은 아내의 여성성을 지켜줘야 한다. 아내는 남성성을 지켜줘야 한다. 많은 남자들이 결혼하고 나서 아내의 여성성을 황폐화시킨다. 이렇게 하면 좋은 수족은 될 수 있어도 좋은 아내나 엄마가 될 수는 없다. 좋은 아내가 될 때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있다. 

제네바 있을 때 아들 넷을 데리고 온 아내가 왔는데 이건 흡사 투사의 모습이었다.(웃음) 아들 넷을 혼자 키우며 아내가 힘들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렵게 사신 권사님 댁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아 가는 길에 아내가 귀걸이를 하고 나왔길래 내가 귀걸이를 빼라고 했다. 어렵게 혼자 살아오신 권사님께 목사 사모가 귀걸이를 하고 찾아뵙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었다. 아내는 두말없이 귀걸이를 뺐다.

아내는 여성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귀걸이 어렵게 사서 달은 것이었는데 내가 몰랐다. 나중에 말을 들으니 아내는 그 말을 들을 때 흡사 거세되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아내에게 목사 사모의 틀을 강요하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 다음 올 때를 기다려 내가 속죄하는 마음으로 귀걸이를 샀다. 귀걸이를 보고 좋아하는 아내가 나에게 귀 뚫어도 되냐고 물었다. 귀를 뚫어야 하는 귀걸이었는데 그런 것도 몰랐던 것이다. (웃음) 그래서 내가 제네바에서 귀 뚫는 데까지 가서 귀를 뚫어줬다. 

그리곤 내가 아내에게 당신 나이 정도 되면 옷 입을 때 무슨 색깔 입을까 묻지 마라. 당신이 충분히 절제하니 당신 여성성을 지키기 위해서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바로 이런 노력이 있을 때 신뢰가 가는 것이다. 자식들 역시 그런 부모를 보면서 같은 가치관을 키워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같은 가치관으로 살아가기때문에 내가 목사라고 해서 내 처가 후회를 한다거나 하는 일은 내가 아는 한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내가 같이 왔으니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웃음)
 

김영봉 목사 / 두 개의 질문이 남았는데 시간이 많지 않아 대신 읽겠다. 이재철 목사는 함께 사역하고 있는 부교역자를 어떻게 대우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이재철 목사 / 교역자들을 부목사님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그냥 목사님이라고 부른다. 다 같은 목사요 동역자인데 다만 역할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교인들 중에서도 부목사라고 부르는 분들이 많이 계시지만 부 자를 빼고 부르는 분들도 계신다. 내 목회 철학은 내가 열심히 헌신해서 나로 인해 부목사들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주님의교회 때부터 선임 부목사와 내 월급의 차이는 10만 원이었다. 재정 담당하시는 분들에게 "내 봉급을 올려줄 생각하지 말고 동역자들 월급 올려드려라. 그러면 나도 10만 원 올라간다"고 말했다. 

어떤 분들은 나를 배우겠다고 지원을 해서 삼수 끝에 들어온 분들도 있다. 나는 그 분들에게 "나를 배워서는 안 된다. 나를 넘어 서야 된다. 나는 얼마든지 여러분들의 디딤돌이 되겠다. 나를 밟고 서라. 나는 이미 예순이 넘은 사람이고 구시대의 사람이다. 그러니 내가 하는 대로 해선 안 된다. 나를 밟고 서면 내가 여러분들을 버텨 줄테니 여러분들로 인해 한국 교회의 한 부분이 새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우리 교회는 나를 포함해서 교역자들에게 사택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택만은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 이유가 있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살이를 한 사람이다. 교인 석에 앉아서 목회자들을 지켜 본 기간이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목회자들 가운데에서 학부부터 신학교를 가고 졸업한 사람들은 세상을 모른다. 세상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모른다.

돈 버는 것 절대 쉽지 않다. 내 자식의 학비를 대기 위해서 상사로부터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지 모른다. 여러분 목회하는 교회의 장로, 집사들 다 주일에는 웃고 앉아 있지만 그 분들 하루에도 열 번씩 사표 생각할 것이다. 못 죽어서 그 직장 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젊은 교역자들은 졸업해서 용케 한 교회의 전임 교역자만 되면 한국 상황에서는 집 주고, 차 주고 전부 다 준다. 그러니 세상살이를 모르니 아무리 책을 많이 보고 아름다운 설교를 해도 현실 속에서 뼈 빠지게 살면서 온 사람들에게 목사의 설교는 뜬 구름 잡는 소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목사들에게 보수는 나하고 별 차이 없이 많이 드리되, 적어도 집만은 사글세를 내더라도 본인이 책임지자고 했다. 세상도 알고 가장으로 내 집안 식구들을 내가 사는 집은 사글세 돈이라도 내가 내고 살겠다는 결단이 서 있는 목회자만 이재철이의 사병이 안 될 것이다. 내가 잘 못하면 "목사님 틀렸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나. 그리고 이 목사가 변질됐다 생각하면 교회를 박차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박차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뭔가 장치를 스스로 만들어둬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모든 것 다해 주는 것, 그 안락한 삶에 젊은 나이부터 적응해버리면 결국 그 교회 담임목사와 재정 장로의 사병이 되어버린다. 한국 교회에서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 교회 교역자들이 다 목사 시키는 대로만 하지 않나. 왜 그러겠나. 여기 나가면 내 자식들 살 데가 없기 때문이다. 사글세방에서 살 결심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교역자들에게 "100주년기념교회가 여러분들에게 사택을 안 주는 것은 돈을 아끼려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유 아니다.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목회자의 정신을 지켜주는 한 방편이다. 그래서 그런 목회자를 뽑을 때부터 단서조항이 붙어있기 때문에 편안한 길을 가시려는 분들, 굉장한 학력을 가지신 분들은 아예 지원하지 않는다. 사명감을 가진 사람만 한다. 목사답게 살아보겠다는 사람만 지원한다. 매년 뽑는 숫자가 제한되어 있다 보니 재수, 삼수하는 사람도 있다. 

김영봉 목사 / 마지막 질문도 대신 읽겠다. 100주년기념교회의 교인의 참여율이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다.

곽선희 목사가 내가 신학교 다닐 때 강연에 와서 교인들 중 10%만 헌신을 해도 대단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주님의교회에서나 100주년기념교회에서나 헌신적으로 하는 교인들이 10%를 훨씬 넘는다고 생각한다. 묘지 참배객들을 위한 봉사자가 주중에만 연 500명이 넘는다. 그리고 토요일에는 구역들이 돌아가며 관리부 집사들 수십 명이 나와 예배당을 청소한다. 그래서 양화진 묘역이 있기 때문에 그 묘역을 청소하는 관리인들은 있지만 건물 안을 청소하는 청소부는 없다. 교역자 사무실은 교역자가 한다. 

목회자의 권위는 목회자가 자기의 것을 포기하면 세워진다고 말했는데, 내가 한때 영적으로 방황할 때 내가 스님들도 친구로 삼고 신부들과도 교분을 쌓으면서 그분들을 보면 구도의 정신, 가는 길은 다르지만 배워야 할 것이 참 많았다. 주님의교회를 개척하고 새벽기도가 끝나면 동역자들과 함께 사무실 책상을 내가 걸레질하고 사무실 쓸었다. 

스님이 되기 위해서 출발하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청소다. 궂은일부터 구도의 삶이 시작된다. 내가 신학교 입학하자마자 서점에 가니 누가 나를 전도사라고 불렀다. 나는 내가 전도사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 서점 주인 대답이 "입학하면 다 전도사지 않나"고 했다. 신학교는 가면서부터 전도사이고 아버지 같은 교인들 회의하는 데 가서도 상석에 앉는다. 그렇게 해가지고는 구도의 삶을 살기 힘들다.

스님이나 신부님들은 전부 자기 손으로 한다. 그렇게 교역자들이 청소하는 모습을 보고 교인들이 한 두 사람씩 참여하기 시작했다. 새벽 기도가 끝나면 강남 YMCA 건물 전체를 교인들이 매일 다 쓸었다.

교인들의 참여율을 어떻게 올리는가. 다른 방법이 없다. 목회자가 앞장서면 된다. 교인들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 100주년기념교회가 세워질 때 내가 58살이었는데 지하실에 사무실을 줘서 3명이서 닦고 준비하며 사무실을 마련했다. 그런 것이 교인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김영봉 목사 / 준비한 강의 대신 즉각 질문을 가지고 그 자리에서 정리해서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에너지를 많이 필요로 했다. 두 시간 동안 흐트러짐 없이 강의해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린다.

*후속 기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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