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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pia 내마음의 서재 <강명옥 이사장의 서재는 사람과 세상을 보는 창문이다>

평화 강명옥 2014. 1. 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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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옥 이사장의 서재는 사람과 세상을 보는 창문이다.

저는 책을 좋아해서 중고등학교 시절에 한국문학시리즈, 세계문학시리즈 같은 소설이나 시도 많이 읽고, 또 「헬렌 켈러 자서전」 이나, 「말콤 엑스」, 「간디 자서전」 등 사회문제와 관련된 인물의 자서전 등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성인이 돼서도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 링컨」, 「백악관에서 감옥까지」 같은 책을 좋아했죠. 책을 읽으면서 사람과 사회, 세계에 대해 궁금했던 것을 해소하고 가치와 비전을 발견하게 됐어요.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쓰시려고 많은 곳을 다니게 하셨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과정이 결국은 “하나님 나라 갈 때까지 배워야 할 것을 배우게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내일 저를 어디로 인도하실지, 또 어디로 보내실지, 또 무엇을 하라고 하실지 궁금해 하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 가운데에서 서재는 저에게 사람과 세상을 보는 창문과 같은 곳이에요

하나님의 손

저는 모태신앙이었지만 부모님이 교회를 떠나시면서 저도 자연스럽게 안 나갔어요. 중3 때 저 혼자서 잠시 교회를 나갔다가 고3 때 또 떠나게 됐었죠. 고3 때까지는 의과대를 가고 싶어서 이과를 선택했었는데 성적이 좀 떨어지면서 포기하고 읽고 싶은 책이나 실컷 읽자는 생각에 인문학 쪽으로 진로를 바꾸기로 했어요. 대학진학 후에 멘토로 지내던 분과 이야기하면서 대학생활을 열심히 경험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이곳저곳 활동을 하게 됐는데 대학교 4학년 때가 되니까 무엇을 할지 고민이 되는 거예요. 그러다가 현대중공업에서 전에 없이 대학졸업자 중에 여자 신입사원을 채용한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했는데 들어가게 됐죠. 그리고 8년을 일하게 됐어요. 하지만 회사에 다니는 동안 좀 더 공적인 일, 좀 더 봉사하는 일, 좀 더 국제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죠.

그때까지는 계속 교회를 떠나있던 시기였는데 주위에 교회 다니는 분들이 이제 다시 교회 오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저는 아직 때가 아니라는 말로 10여 년을 버텼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쓰러지셨어요.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의식이 돌아오셔도 반신불수나 전신마비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문득 “하나님께서 나 대신에 아버지를 치셨구나.”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어요. 그 날이 12월 31일이었는데 그 다음 날 1월 1일이 제 인생에서 제일 많이 눈물을 흘린 날이 됐어요.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하면서 “아버지를 살려주시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삶을 살겠습니다.”라는 기도를 했죠. 그때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된 계기가 됐어요. 그렇게 지나고 나서 아버지는 정말 거짓말처럼 완쾌되셨고 17년을 더 살다가 돌아가셨어요.

그 후에 말씀을 깊이 보려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어요. 휴가를 내서 성경 일독을 하자고 마음먹고 집에서 성경만 읽었죠. 그런데 어머니께서 어느 날 성경 읽는 저를 보고 뭘 하는 거냐고 성경 다 찢어버린다고 하면서 나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어떡해야 하나? 큰일 났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날 저녁에도 아무 일이 없더니 다음 날 아침에 어머니께서 안 보이시는 거예요. 나중에 저녁이 돼서 조용히 여쭤 봤더니 제가 성경 읽는 것을 보시고 벌컥 화를 내고 나가셨는데 옛날 교회 다닐 때 알고 지내시던 권사님을 만나셔서 교회 가자고 권유를 받으셨대요. 그리고는 다음 날 새벽기도회를 나가신 거였어요. 그리고 이후부터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도와주셨지요. 참 하나님께서 신기하게 인도해 주셨죠.

또 특별한 인도 - 평화복지대학원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서 저에 대한 기도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하게 됐어요. 그때까지 저는 겉으로 보기에 공부도 웬만큼 하고 직장도 좋은 곳에 다니면서 잘나가는 인생으로 보이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어요. 늘 시끄러운 일이 많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평화에 대한 기도를 많이 했어요. 그렇게 기도하면서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됐죠. 그렇게 고민하던 중에 경희대학교 평화복지대학원에서 공고가 난 것을 봤는데 그 취지가 세계 평화와 인류복지에 기여하는 인재를 뽑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원을 했는데 그때 면접이 3차까지 있었어요.

1차 마치고 2차로 학원장님과의 면접시험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학원장님이 “세상에 안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참 못 살 세상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나쁘게만 보이지는 않습니다. 파도가 풍랑이 일어나도 다시 잔잔해 지는 것처럼 새로운 질서로 잡혀가기 전에 혼란스러울 뿐입니다.”라고 했죠. 그렇게 굉장히 긴 시간 면접을 봤었어요. 3차 면접 때에는 전 교수님들 앞에서 보는 면접이었는데 학원장님께서 3차 면접까지 왔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먼저 감사합니다. 제가 여기에 붙을 필요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붙여주실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떨어뜨리시겠죠.” 그랬더니 다 경악하신 거예요. 그리고는 여기를 졸업해서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물으시는데 그때 제가 회사에서 과장 진급이 얼마 안 남은 대리였어요. 교수님께서 “여기 졸업해도 현대 같은 회사에 들어가기 어렵다.” 그러셨는데 제가 “저도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했더니 다 기가 막혀 하셨죠. 그래서 “저는 세 가지를 소망하면서 지원하게 됐는데 사기업에서 일하면서 보람이 있었지만 좀 더 공적이고 봉사하고 좀 더 국제적인 일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그때는 한국이 유엔에 가입이 안 돼 있던 시기였는데 제가 국제기구에 들어가고 싶어 하시는 줄 알고 대사 출신 교수님께서 여기 졸업해도 국제기구에 못 들어간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옆에서 학원장님이 혹시 이 학생이 졸업할 때는 유엔에 가입 돼 있을지 모르지 않느냐고 말씀하시는데 다 웃으시더라고요. 당시에는 불가능한 일을 말씀하신 것이었기 때문에 우스운 말이었죠.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기자가 된다. 대통령이 된다. 얘기했는데 그래도 대답이 달라서 그랬는지 합격을 하게 됐죠. 그런데 나중에 몇 개월이 지나고 나서 교수님 중에 장로님이셨던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저에게 원래 자신은 제가 입학하는 것을 반대했었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교수님들 앞에서 반대한다는 발언을 하시려는데 목이 갑자기 탁 눌리는 것 같으셨대요. 그래서 “아, 하나님께서 내 입을 막으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그분이 반대한다고 말씀하셨다면 못 들어갔었겠죠.

교만을 꺾고 주신 자리 - 한국국제협력단(KOICA)

대학원을 졸업하는 시기에 하나님 앞에서 기도 하다가 허무한 마음이 들게 됐어요. 진로를 어디로 정해서 가야 할지 막막했었거든요. 그런데 그때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만들어져서 경력직 인원을 뽑는 공고가 난 거예요. 그런데 “세계평화 인류복지에 기여할 인재를 뽑습니다.”라는 문구가 대학원 모토와 똑같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여기로 가라고 하시는구나.” 생각했죠. 저는 공직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현대중공업에서 8년 일한 것만으로 원서를 냈어요.

그렇게 냈는데 1차 서류심사가 통과 되고 2차 필기시험 보고 나서 3차 면접 전에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때는 계속 밤새우면서 논문을 쓰고 있었는데 2차 합격 통보를 받은 거예요. 그리고 3차 면접 날짜를 들으면서 그 날이 주일과 겹친다는 생각을 했죠. 부모님은 친척 장례식장에 가셔서 집에 안 계셨고 동생들도 다른 곳에 있어서 저 혼자 집에 있었어요. 그리고 다음 날이 토요일이었는데 밤새 논문 작업에 지쳐서 하루 종일 잠을 자고 다음 날 주일 아침 면접을 보러 갔어요. 그런데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날짜를 다시 살펴봤는데 면접 날짜가 주일이 아니라 토요일이었던 거죠. 그때 드는 생각이 내가 너무 교만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 원서 넣을 때는 겸손하게 넣었는데 계속 진행되면서 그 당시 나만 한 이력을 가진 여성이 또 없을 거라고 자만했던 거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기도했죠. “이제는 다 합격자 결정도 끝이 나서 하나님께서 들여보내 주시지 않으시면 방법이 없습니다. 이곳에서 일을 해야 되겠는데,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면 시키시는 일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에 찾아갔죠. 그래서 인사담당자를 만났는데 저를 알고 있는 거예요. 나중에 보니까 저는 거의 합격이 돼서 부서배치까지 다 된 상태였는데 최종면접에 안 나왔던 거였어요. 그래서 왜 안 나왔느냐고 물어서 일요일인 줄 알고 어제 나왔었는데 그때까지 연락 한 번 못 받았다고 말했더니 저한테 연락한 증빙서류가 없는 걸 보고 간부회의를 통해서 다시 면접을 보게 됐어요. 그렇게 30여 분 동안 단독으로 면접을 보면서 현대중공업 다니다가 대학원 진학한 것과 제 생각들을 다 얘기하게 됐고 특히 제가 쓰던 논문 내용을 이야기하게 됐어요. 그 내용이 일본과 대만의 직접투자에 관한 비교분석을 다루는 것이었는데 수출을 잘하기 위해서 그 나라와 관계를 친밀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 한국의 코이카와 같은 일본의 자이카를 예로 들어 설명하는 부분이 있었죠. 그렇게 면접을 보고 합격을 하게 됐어요. 정말 불가능했던 일이었는데 말도 안 되게 하나님께서 들여보내주셨어요. 그리고 7년을 일했죠. 그 후에 여러 기관을 거치면서 많은 일들을 접하게 됐는데 하나님께서 과정마다 필요한 경험을 하게 하시고 그 와중에도 모든 일들이 국제협력과 봉사와 관련된 업무들을 맡아서 하게 하셨던 것 같아요.

안내자, 길라잡이

처음 현대중공업에서도 여자 대학졸업자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이목이 집중됐었는데 이렇게 저는 처음이 됐던 경우가 많았어요. 국제협력단도 처음이었고 그다음 들어간 유네스코 국제이해교육원도 생기고 처음 기획실장을 맡게 됐고 국가인권위원회도 처음 국제협력과장을 맡은 거였어요. 그래서 제 소명이 처음 만들어진 기관에 들어가서 세팅을 하고 나오는 그런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조직이나 사람에 대해서 필요한 공부를 시키셨던 거죠. 하나님께서 개별마다 주신 달란트와 소명이 있는데 제가 했던 일들이 처음 갔던 길들이 많아서 주변에서 사람들이 많이 물어오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저 자신이 안내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코이카나 통계청, 또는 다른 부처와 해외 프로젝트들을 진행하면서 제가 맡아 왔던 일들과 관련해서 자문위원으로 많이 활동하고 여러 곳에서 특강도 하고 있어요. 국제협력에 대한 관심이나 프로젝트에 대해 문의하는 내용에 대해서 어디서든지 요청이 오면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일이라고 생각하고 도움을 드리고 있죠. 경쟁이 살벌한 국제사회에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모든 나라가 아무 조건 없이 나라의 0.7%를 어려운 나라를 도와주자고 결정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역사라고 봐요. 그것을 통해서 숱한 사람들이 구제를 받고 나라를 일으켰죠. 그 대표적인 나라가 대한민국이에요. 세계 최빈국에서 이제는 많은 나라를 돕는 나라가 됐어요. 이런 것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 강의 요청에 대해서 거절하지 않고 가서 나누는 것이죠. 아이들이든지, 인원이 적든지, 호응이 좋든지 안 좋든지, 누구든지 들을 사람이 있으면 일정이 힘들어도 가려고 해요. 그곳에 제 역할과 소명이 있다고 봐요. 길라잡이, 길 안내자 같은 역할 말이에요.

사랑의 조건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이제까지 과정을 보면 제가 자랑하는 것은 다 깨뜨리시더라고요. 누구한테나 그러시지만 건강을 자랑하면 건강을 깨시고 졸업 후에는 쉬지 않고 일을 했는데 몇 년을 쉬게 하시고 또 사람들과 잘 지낸다 생각하고 있으면 관계가 끊어지는 상황이 되기도 하고 그러면서 이게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죠. 결혼에 대해서도 쉽게 생각했는데 38살이 되니까 거의 포기하게 됐어요. 제가 결혼할 조건이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하나님 믿어야 하고 다른 하나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랬더니 누가 그 나이에 하나님 믿으면서 사랑까지 바라면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복장이 항상 정장에다가 검은 가방을 메고 다녀서 전도사님 같은 이미지였는데 더 어려웠죠(웃음). 코이카에 들어가서 기도하다가 신우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믿음이 좋은 사람들을 찾아서 같이 모임을 하게 됐어요. 지금은 2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이는 규모로 커졌다고하는데 제가 코이카에 들어간 이유가 신우회를 만드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심히 하고 나왔어요. 그런데 남편을 알게 된 곳이 코이카였어요. 그때 당시에 남편은 해외에서 외교관이었다가 파견 나온 직속상관으로 있던 사람이었는데 모든 사람이 좋아할 정도로 성품이 좋았어요.

그런데 제가 태국에 발령 나가 있던 때에 이분은 김대중 대통령 아태민주지도자회의(FDL-APThe Forum of Democratic Leaders in the Asia-Pacific) 사무총장으로 가게 됐어요. 태국에서 돌아와서 이분하고는 업무적인 얘기만 하면서 지냈었다가 한 번은 꼭 만나서 얘기할 것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만났는데 자기 얘기를 하시면서 주변에 좋은 여자분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알았다고 말씀드리고 헤어졌죠. 그리고 나서 제가 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됐어요. 그런데 이분이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연락이 없으니까 저를 찾다가 병원에 있는 것을 알고 이쪽으로 오신다는 거예요. 저는 좀 당황스럽기도 했는데 가까우니까 와보신다고 하셔서 알겠다고 했죠.

그런데 제가 오래 병원에 있었으니까 나가서 밥을 사주시겠다고 밖으로 나가자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런데 병원에서도 외출이 허락 돼서 나갔는데 가까운데서 안 먹고 장흥까지 가서 사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먹고 오는데 길이 막혀서 한참 있다가 늦게 병원에 도착하게 됐어요. 그때 병원에서는 환자가 외출했다가 안 돌아온다고 소동이 좀 났었는데 저는 그 계기로 마음에 변화가 좀 있었어요. 그리고 나중에 서로 더 많은 얘기를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차 안에서 밤을 새우기도 하고 한강 둔치에 가서도 밤새 얘기하고 그랬었죠. 환자복 입고 그렇게 데이트하면서 마음을 굳히게 됐어요. 그리고 매일 그분이 병문안을 왔어요. 나중에 퇴원할 때 병원 사람들한테 저희 결혼할 사이라니까 다 알고 있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사람들이 낮에는 방문객들이 바글거리면서 찾아오는데 밤이 되면 환자가 없어지고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 궁금했대요. 그리고 퇴원하는 날 프로포즈를 받고 일주일 후에 시댁에 찾아갔어요.

이제 17년 결혼생활 하는데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생각에 감사했어요. 배우자 조건이 무어냐고 질문을 받으면 늘 답이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후배들에게 결혼 기도제목을 적을 때는 되도록 상세하게 적어라. 그러죠(웃음). 결혼하고 일도 많았지만, 가정 살림을 하면서 남편의 이해가 가장 큰 힘이 됐어요. 남편과는 부부면서 친구와 같은 관계에요. 결혼하니까 좋은 점이 같이 기대고 일어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게 좋더라고요. 서로가 서로의 의견을 다 수용하고 따라주고 제가 하고자 하는 일에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이 좋았죠. 요리도 남편한테 다 배웠어요. 그런데 제 결혼에 대한 가장 큰 꿈은 남편과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이것조차도 욕심 부리지 않고 내려놓고 담담하게 처리할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는 것 같아요. 지금은 남편과 교회생활을 같이 잘 하고 있죠.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열매

우리나라가 90년대 이후 경제가 나아지면서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변하게 됐어요. 그래서 여러 부처에서 하던 국제협력업무가 코이카로 통합됐죠. 이 국제개발원조(ODA) 사업은 1945년 이후에 UN이 국가 GDP의 0.7%를 나누자고 결정한 사항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국제협력단은 봉사단 파견이나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통해서 사업을 진행하고 해외연수생들이나 공무원들을 모아서 교육하는 등의 일을 하고 있죠. 현재 우리나라는 GDP의 0.16%의 비율로 지원이 이뤄지고 있는데 세계 수준에 비해서는 많이 떨어지죠. 2015년까지 0.25%로 올릴 계획을 하고 있지만, 경제상황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어요. 우리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처럼 국제사회에서도 국가 간에 어려운 나라를 당연히 돕는 것이 코이카의 기본 취지에요.
코이카에서 진행되는 사업은 사회 각 분야에 사람들이 참여하게 돼요. 대학생들이나 퇴직자들이 해외봉사단으로 나가고 외국의 공무원이나 연수생들을 불러서 교육하는데 각 학교나 교육기관이 담당 하게 되고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통해서 해외에 병원이나 학교 등 공공시설물을 짓는 데 필요한 인력과 관련 산업들이 또 참여하게 되죠.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굉장히 많은 분야에서 부분적으로 국제협력과 관련된 일들을 해 나가고 있어요. 한 번은 해외봉사단 평가차 필리핀을 방문하였는데 여러 봉사단원들이 팀제로 파견된 곳으로 약초가 많이 자라고 있는 곳이었어요. 들어보니 봉사단원들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지 여론조사를 하다가 주민들이 그곳에 약초를 가지고 약을 제조해서 판매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그곳에 연구소를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봉사단원들이 약초를 제품화해서 팔게 됐죠. 그리고 영양실조 걸린 아이들을 유치원에서 치료하면서 유아교육도 받게 했고 또 마을에 물탱크도 만들어서 물 공급이 이뤄지도록 하는 등의 사업을 진행시켰다고 합니다.

마을 대표는 해외봉사단원들의 활동 평가에 대하여 자신은 처음에 한국 봉사단원들이 너무 정확해서 상당히 귀찮았었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마을 일에 잘 모이지도 않았었는데 한국의 봉사단이 들어오고 나서부터 바뀐 것이 있데요. 한국 사람들을 보면서 정확하게 시간 지키고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에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 한국이 이런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발전할 수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이제는 마을 사람들이 마을 일에 모인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마을 사람들을 바꿔준 것이 너무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지난 20여년간 해외봉사활동을 하고 돌아온 단원들이 만 명이 넘었는데 봉사단원들이 활동한 지역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이 많아요. 이 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2천명에 가까운 단원들이 열정으로 봉사하고 있지요.

국제협력과 관련해서 「국제개발협력의 첫걸음」이라는 책이 있는데 기본적인 이해에 도움이 되고 또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은 왜 이런 곳을 도와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책이에요. 그리고 「국제기구의 과거· 현재· 미래」라는 책이 최근에 나왔는데 세계 국제협력에 대한 전반적인 시각을 정리해 놓아서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어요. 제가 공저한 「글로벌 시대의 이해와 국제매너」는 이슈가 되는 국제환경이나 경제, 인권 등의 글로벌 문제들을 주제별로 정리해 놓은 책이에요.

넓게 깊게 보고, 배려하라

저는 학생들에게 강의하면서 독특한 방법으로 과제를 내는데 120세까지 매년 이룰 목표를 세워서 계획을 잡으라고 내주죠. 그러면서 자신의 비전과 꿈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고민하게 해요. 그래서 1년이 지날 때마다 자신을 점검하게 하는 것이죠. 책을 읽는 것에 대해서도, 대학생 때 필요한 것이 한 명의 스승과 열 명의 친구와 백 권의 책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요새 많이 나오는 권장도서 백 권 리스트에 있는 책이라도 읽는다면 여러 분야에 대해서 두루 알 수 있게 돼요.「정의란 무엇인가」,「블루오션전략」,「삼국지」,「탈무드」 등과 같은 책들이죠.

그리고 제가 가르치는 방식이 강의시간에 글로벌 이슈에 대한 책을 주제로 매주 발표하게 해요. 그리고 다른 하나가 자신이 관심 갖는 국가와 관심 분야를 정해서 그에 대한 기사를 검색하게 하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기사를 스크랩해서 자신의 주관적인 평을 써오게 해요. 이 과정을 거치게 되면 시야가 넓어지고 현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시각이 생기게 되죠. 이렇게 강의를 듣고 나서 전공을 바꾼 학생들도 있었어요. 학생들에게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국제매너에 대해서 강의하면서 한국사람들이 외국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일하는 것이 중요한데 큰 단점이 그들과 같이 합력해서 나간다는 기본적인 마음이 부족한 거였어요. 아는 사람에게만 친절한 성향이 강하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이에요. 배려하는 마음이 있으면 국제매너 특별히 강의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나라마다 지역마다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나 팁 문화, 음식 먹는 방법 등의 문제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기본이 되어야 하죠. 국제사회에서는 아주 중요해요.

기도제목은 세계를 넘어 북한으로, 주님이 주신 곳으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고 또 평생의 모토로 삼고 있는 말씀이 시편 23편이에요. 박사과정을 정치학으로 공부하였는데, 코이카를 나오던 때에 들었던 생각이 결국 우리나라가 통일이 이루어질 텐데, 통일이 되고 나면 북한을 개발해야 하잖아요. 언젠가는 “나의 마지막 소명이 이 북한에 대한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논문 주제도 북한 인권에 관한 내용이에요. 현재 하는 일은 국제협력과 관련된 일이지만 통일에 관한 일도 다른 강의나 여러 가지 자문을 통해서 꾸준히 해 나가고 있죠.
2007년에 만들어 지금까지 운영해오고 있는 한국국제개발연구소는 평생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일을 통해서 수많은 분야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됐어요. 그동안 ODA사업에 대한 사전조사, PMC, 평가 등을 해왔고, 작년에는 <에티오피아 경제개발 세부실행전략수립사업>, <아프리카 보건의료 ODA전문가 파견사업>, <베트남 통계청 통계교육 및 통계인력 역량강화사업> 등을 수행하였어요. 올해부터는 3년간 아프리카 <가나 볼타지역 모자보건개선사업>을 연세대 보건대학원과 함께 할 예정이에요. 이곳에서 만난 전문가들과 함께 어려운 곳에 언제든지 계속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으로 쓰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남편과 항상 하는 얘기가 “우리는 내일 어디로 가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면 간다.” 이렇게 다짐하는데 이 연구소가 어려움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지속되어 온 것도 하나님께서 소명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언제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제 소망이에요.

- 인터뷰 진행&정리 : 김무진 작가,김하연 진행
- 사진 : 유재호 작가
- 기획.제작 : 사랑의교회 인터넷사역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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