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생각들

흑인들이 마음을 열었어요

평화 강명옥 2002. 9. 14.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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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전 1989년 가을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에 입학한 11기는 모두 6명이었다. 남녀 각각 3명이었는데 우리는 같은 동기로 경력과 나이는 틀렸지만 마음이 잘 맞았다. 매일 밤이면 모여 인류를 걱정하며 사회를 걱정하며 학교를 걱정하며 그렇게 세월을 보냈다.

졸업한지 10년이 지난 지금 6명 중 4명은 미국에서 활동하고 2명은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동기끼리 결혼한 재호와 혜경이는 미국에서 법과대학원을 나와 변호사 되었고 부부가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학기 위 선배인 명재와 결혼한 은이는 남편과 함께 공부를 계속해서 역시 부부가 같이 미국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있다. 신학대학 출신인 상진이는 공부하러 갔다가 워싱턴에서 한·흑 갈등을 해결하는 평화운동가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도성이가 국회의원 비서관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리고 내가 한국국제협력단, 유네스코국제이해교육원을 거쳐 지금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을 하고 있고...

이번에 상진이에 대한 기사가 한겨레21에 실렸다. 세계 중심인 워싱턴 한복판에서 평화를 만들어 가는 일을 하게 인도하신 하나님의 신묘(神妙)하심을 새삼새삼 깨닫고 감사하게 된다.

한겨레21 <사람과 사회> : 2002. 9. 11

" 흑인들이 마음을 열었어요"
- 박사학위 포기하고 워싱턴 빈민가에 뛰어든 '평화나눔공동체'의 최상진 -


미국의 수도 워싱턴DC 북서부의 알스트리트 4번가 미국 대도시 흑인 집중 거주지구(흑인 게토)의 한곳이다. 잡동사니와 음식물 찌꺼기 따위로 너저분한 거리 양쪽엔 불에 타다만 것 같은 낡은
집들이 늘어서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50-60년 전 백인 부촌이던 이곳은 이제 택시들도 외면하는 우범지대로 변했다.

< 거대한 후원의 물결을 조직하다 >

오후 4시께, 대낮인데도 마약에 취한 흑인이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광경이 목격된다. 어두워지자 골목길에 주차된 승용차 주변에서 흑인 대여섯명이 하릴없이 서성거린다. 은밀히 마약을 거래하는 사람들이다. 미국의 심장부 백악관에서 승용차로 5분 남짓한 거리에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 거리 모퉁이의 2층 벽돌집에 '평화나눔공동체(APPA=Action for Peace through and Aid, )
가 자리잡고 있다. 최상진(40) 목사가 흑인 노숙자(homeless)와 빈민을 위해 마련한 쉼터다.
영문약자 '아파'가 우리말의 '아픔'과 비슷한 울림을 빚어낸다.

빈민과 홈리스들은 시도 때도 없이 현관문을 두드려댔다. 샌드위치를 찾기도 했고. 커피나 생수를 부탁하기도 했다. 찾아오는 흑인들을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올해 5월부터 8월
사이에 거리의 홈리스들에게 나눠준 생수가 2만병이었다. 바캉스는 꿈도 못꾸는 빈민 가정의 어린이들을 모아 캠프를 열기도 했고, 1주일에 한번씩 무용도 가르치고 있다. 이밖에 이발해주기, 헌 옷과 신발 제공, 웨딩드레스 대여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황량한 거리엔 진달래와 백합을 심었다. 일요일이면 쉼터는 교회로 변한다. 지난해 쉼터의 도움을 받은 빈민과 홈리스는 모두 3만6483명으로 집계됐다. 인종 간 화합을 주제로 하는 월간 영자 신문인 <피스 타임스>도 발행하고 있다.

쉼터의 운영은 오로지 후원자와 자원봉사자들 덕택이다. 지난 해 미국 각지에서 찾아와 봉사활동을 펼친 한인은 1만9016명에 이르렀다. 주로 한인교회 교인들과 학생들이었다. 돈으로 후원하는 이도 있고, 생수나 과일을 제공하기도 한다. 후원자인 이연옥씨는 지난 7월 20일 아들 성찬이의 백일날 120명분의 음식을 만들어와 거리의 홈리스들에 나눠주며 백일잔치를 벌였다. 흑인 홈리스들이 봉사활동에 동참하기도 한다. 두 아들이 마약에 빠져 있고, 스스로도 알코올중독과 싸우고 있는 홈리스 제리 알링턴, 지난 5월 에이즈로 아들을 읽은 부륵스와 게일 부부가 그들이다. 미국 홈리스의 40%는 가정이 있으며, 흑인이 49%, 백인이 32% 히스패닉 12%, 인디언과 아시아계가 각각 4% 안팎이다.

유학생 신분이던 최 목사가 흑인 빈민지역 활동에 나서게 된 것은 흑인과 한인 사이의 인종적
갈등이 계기가 됐다. 경기도 시흥 등지의 도시산업선교회에서 활동하던 최 목사는 94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인디애나의 메노나이트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평화학 석사과정을 마친 그는 96년 워싱턴CD 부근의 조지메이슨 대학 분쟁해결학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아무도 들어가려 하지 않던 곳>

어느 날 <워싱턴포스트>에 난 한·흑 갈등 기사를 주제로 수업이 진행됐다. 그는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의문이 솟았다. 도대체 흑인들은 왜 그토록 한인들을 미워하는 것일까. 로스앤젤레스 폭동 이후 흑인들의 한인들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면서 그 무렵 워싱턴DC와 인근 지역에서도 한인들이 흑인들의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매년 몇건씩 발생했다. 6주 사이에 2명이 살해되고, 1명이 중상을 입자 한인들이 범인 체포에 현상금을 내걸기도 했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흑인들을 상대로 세탁소나 술가게를 운영하는 한인들이었다.

워싱턴DC 지역의 한·흑 갈등을 짚어보려면 약간의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세계 정치·외교의 중심무대인 워싱턴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백인들이 인근 버지니아주와 메릴랜드주의 고급 전원 주택지를 찾아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빈자리를 흑인들이 메웠다. 이제 워싱턴 거주 백인 인구는 25%에 불과하다. 때문에 시장도 전통적으로 흑인들 차지다. 워싱턴은 미국 최고의 살인사건율을 기록하고 있다. 워싱턴엔 약 2500여개의 한인 가게가 성업 중이다. 특히 세탁소와 주류판매점의 90% 이상이 한인 소유다. 한인들은 워싱턴 지역 소수인종 가운데 중국인들을 제치고 경제력 1위의 지위에 올라섰다. 흑인 인구가 많은 만큼 한인 가게의 주요 고객은 흑인들이다. 흑인들은 자신들을 고객으로 삼아 돈을 번 한인들이 흑인들을 위해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며 불만을 키워갔다. 95년 워싱턴에서 대규모 차별철폐 시위를 조직한 흑인지도자 루이스 패러칸은 방송 인터뷰에서 한인들은 흡혈귀로 표현하기도 했다. 흑인들은 한인소유 승용차의 바퀴에 펑크를 냈고, 가게의 유리를 깨뜨렸다. 총질을 해대며 절도나 강도 행각을 벌였고,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 사소한 것까지 합치면 흑인들의 한인 대상 범죄는 1년에 1만여건에 이를 정도였다.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다.

최목사의 고민이 시작됐다. "그곳엔 아무도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나서야 하지 않을까."
신학교수나 큰 교회의 목사가 될 줄로 기대하는 노모의 얼굴도 떠올랐다. 상념은 꼬리를 이었다.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평화학박사가 무슨 소용일까. 평화를 위해 실천하는 자가 평화학박사가 아닐까." 결국 박사과정을 포기하고 흑인 빈민지역으로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1학기도 채 못 마친 상태였다.

그는 곧바로 후원자 모집에 나섰다. 교수와 목사, 변호사, 지역상인 등 자리를 잡은 한인들을 찾아가 취지를 설명했다. 첫 반응은 정말 그곳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이었다. 어차피 포기하게 될 테니 아예 시작하지 말라는 충고도 많았다. 그의 결심이 확실한 것을 확인한 100명이 후원회를 조직했다. 우여곡절 끝에 98년 7월 쉼터 건물을 임대할 수 있었다.

최 목사가 쉼터에 입주하기 위해 건물 수리에 나서자 동네 흑인들의 해코지가 시작됐다. 피부색이 다른 이방인의 틈입을 용인하지 않을 태세였다. 마약 구입을 강요했고, 공구를 훔쳐 가기도 했다. 술취한 이들은 느닷없이 욕을 퍼붓기도 했다. 그가 흑인 노숙자를 위한 쉼터를 만들겠다고 설득  해도 막무가내였다. 돌아오는 것은 "여기서 무슨 장사를 하려고 하느냐 코리안을 증오한다. 너희들은 돈만 안다"는 비아냥이었다. 위협이 심해지면 며칠씩 작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물러서지 않고 작업을 이어가자 흑인들도 차츰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작업을 거들어주는 이도 생겨났다. 이렇게 해서 98년 10월 30일 '평화의 집'(House of Peace)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쉼터의 문을 열었다.

< 백악관 뒷골목의 성자들... >

가슴 아픈 사연도 많다. 쉼터를 개장한지 3개월 뒤쯤 일요일 예배에 참석해 마약 거래 사실을 고백했던 한 흑인이 다음날 총격으로 살해당한 사건을 특히 잊을 수 없다. 나름대로 정한 원칙에 따라 방세를 빌려 달라는 한 빈민의 요청을 거절했는데 알고 보니 에이즈에 걸린 아들을 위해 쓸 돈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아득해질 수밖에 없었던 일, 성폭행당한 40대 홈리스의 고백 등등. 최 목사는 이런 사연들을 모아 10월 초 <백악관 뒷골목의 성자들>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낸다.

이제 최 목사는 이곳 흑인 동네의 유명인사가 됐다. 워싱턴DC의 종교자문위원으로도 위촉됐다. 그가 지나가면 흑인들은 '하이 초이'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인사를 건넨다. 김밥과 김치를 즐기는 흑인들도 많이 생겨났다. 최 목사의 또 다른 애칭은 '김치맨'이다. 버스를 타면 한글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흑인들도 자주 목격된다. 아직도 간간이 강도사건이 발생하지만 쉼터 덕분인지 2000년 이후엔 워싱턴 지역에서 흑인들의 한인 살인 사건이 한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쉼터는 지난 7월부터 2주에 한 차례씩 흑인인권단체 대표와 한인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한·흑 갈등 백서'를 펴낼 계획이다

최 목사에게 두 가지 꿈이 있다. 우선 홈리스들이 한동안 묵을 수 있고, 급식소를 갖춘 건물을 마련하는 일이다. 또 하나는 워싱턴 이외에 한·흑 갈등이 심한 로스앤젤레스나 뉴욕 등지에도 쉼터를 내는 것이다.

워싱턴=임석규 기자

True faith produces a life full of actions, not a head full of facts.
진정한 믿음은 지식으로 가득찬 머리보다는 행동으로 가득찬 삶을 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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