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생각들

From Mongolia to Korea

평화 강명옥 2002. 9. 7.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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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맞이한 막내딸이 여름방학동안 몽골에 봉사활동을 하러갔다 왔다.
늘 그러한 마음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From Mongolia to Korea

'From Bangladesh to Finland'. 현재 유럽 전문 여행사에서 투어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한 분이 소년 시절에 세계 여행을 꿈꾸며 빈 노트에 적어 놓은 말이다.
당시 방글라데시는 그가 알고 있는 나라 중 가장 빈국이었고, 핀란드는 가장
아름다운 복지 선진국이었다고 한다. 언젠가는 세계 곳곳을 돌아보겠다는 소년의
거창한 꿈을 표현한 문구일 게다. 나 역시, 아니 20대 젊은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세계 여행의 소망이 있다.

해외원조 NGO인 GCS(지구촌 나눔 운동)의 해외 봉사단 참가 신청서를 낼 때
순수한 봉사 정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기회에 한 번쯤 ‘떠나보자’는
이기적인 목적도 없지 않았다. 다소 불순한 의도였을까? 하지만 사실이고 귀국한
지금 당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됐다. 최소한 내 의식의 진동 범위가 한 뼘은
넓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라고 감히 말해 본다.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하다’는 말은 단순하고 식상하나 진리이기에. 20년 남짓
살아온 나에게 그 세월보다 훨씬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 지난 3주간의 몽골 해외
봉사 체험.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나에게 고백해 본다.

물 한 컵으로 양치질과 세수를?

막상 시작하려니 막막하다. 뭔가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 생각의 덩어리만 있지
이야기를 하나 하나 풀어낼 실오라기를 잡을 수 없다. 그래서 잠시 눈을 감고
자르갈란트 마을의 신선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셔 보고, 닿을 듯 닿을 듯 잡히지
않는 끝없는 고비 사막의 길 위에 다시 서 본다. 깜박이는 커서가 최면을 거는 듯 하다.

다시 하라면 할 수 있을까.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교외에 있는 자르갈란트 마을에서 보낸 일주일은 단원 모두에게 ‘도전’이었다.
남자들은 40도를 오르내리는 그야말로 땡볕 아래서 조그만 기차 역사를 짓기
위해 온 몸을 태웠다. 여자들은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은 마을 아이들과 손짓
발짓, 그리고 눈빛으로 교육 봉사를 진행했다. 하루 3시간의 수업을 위해 준비물을
챙기고 오리엔테이션을 하느라 밤은 더욱 짧았다.
그 외에도 20인 분이 넘는 하루 세 끼를 단원들 스스로 해결하느라 분주했다.
그 뿐인가. 하루 두 번 배급되는 물을 긷느라 양손과 겨드랑이에 물통을 들어야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해가 떨어지는 밤 10시까지 시간을 쪼개고 쪼개 쓰는 일과는
그리 만만치 않았다. 밤마다 너도나도 코를 골았지만 그 마저 흥겨웠다.
시간이 흐르자 물 한 컵으로 양치질과 세수를 하는
것도 온갖 오물들이 화학
반응을 하는 후끈한 푸세식 화장실에도 제법 적응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에게
머리를 감을 수 있도록 자신의 집 앞마당에 있는
물줄기를 내어준 동네 할아버지의
넉넉한 인심은 더 없는 축복이었다. 식수에서 잠자리까지 모든 것이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단원들 각자의 이름이 적힌 기차 역사를 뒤로 한 채 기차를 탈 때는
‘이제 어디서든 살 수 있다’란 자신감도 생겼다.

사막화, 남의 일이 아니다.

자르갈란트 마을에서 나와 사막화를 경험하기 위해 4박 5일간의 고비 사막 여행을
할 때도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식빵처럼 생긴
‘프레건’이라는 러시아 차를 타고 달릴 때는 먼지가 하도 많이 날려서 매일
모래를 한 숟가락씩 떠먹는 것 같았다. 사람마저 짐처럼 느껴지는 비좁은 차안은
태양에 달궈져 그야말로 찜통이었다. 아무리 갑갑해도 별 수 없이 앉아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무기력 마저 들었다.

문제는 그런 사막이 점점 더 넓어진다는 데 있다. 눈앞에 보이던 그 드넓던 초원도
점차 줄어들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붉은 모래만 보일 뿐이었다. 한 때 강이었으나
금을 캐면서 결국 강줄기가 10m도 남지 않게 된 곳에 이르렀을 때는 그 심각성을
절감할 수 있었다. 말로만 듣던 사막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사막 한 가운데,
겨우 물이 있는 곳을 찾아 텐트를 치고 사막화 방지를 위한 세미나를 하던 밤.
그 희미한 등불 아래서 우리가 꽤나 진지하게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그 진실한 눈빛만은 잊을 수 없다.

칭기스칸의 후예들, 이방인에게 문을 열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방문하는 게르(몽골 유목민들의 전통적인
이동식 집)마다 아무런 의심이나 대가 없이 우리에게 밥을 지어주고 아이락과
수태차, 아롤 등 몽골 전통 음식들을 쉼 없이 내 놓는 그네들의 환대다. 넓은
초원을 떠돌아다니다 보니 사람이 그리워서 우연히 들르는 이방인들도 그들은
문을 열어 정성껏 대접한다고 한다. 더불어 대제국을 건설한 칭기스칸 시대 때
전 세계 문화를 흡수하면서 몽골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외부인을 받아들인다.

해발 고도 1300m의 고산지대에서 여름에는 엄청난 폭염을, 겨울에는 반대로
끔찍한 혹한을 견뎌야 하는 척박한 삶이지만 그 마음씨만은 그렇지 않은 듯 했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여름에는 에어컨을, 겨울에는 보일러를 돌리며 사는 우리는
어떠한지 생각해볼 일이다.

“고기 좀 먹읍시다!”

이번 활동에서 거둔 가장 큰 성과는 한 마디로 ‘사람에게서 배우다’이다.
우선 제 3세계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보다 유연해졌다. 하루 종일 특별한
일없이 한가하게 노는 것 같아 보이는 몽골 사람들이 처음에는 왜 저렇게
나태하게 살까 의아했다. '어서 빨리 정착하고 열심히 일해서 산업화를 이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은 우리 기준이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고비 여행에서 있었던 일이다.
운전기사들이 어느 때부터인지 쉬는 일이 빈번해져 단원들 사이에서 불평이 터져
나왔다. 갈 길은 뭔데 어리광을 부리듯 한가하게 주변 게르에 들러 노는 그들을
보자니 애가 탔다. 그러면서 그들이 하는 말이 “고기 좀 먹읍시다!” 알고
보니 몽골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 고기가 없으면 식사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육식을 좋아한다. 우리가 ‘김치를 담근다’라고 말하듯 몽골에서는
‘고기를 담근다’란 말까지 있을 정도다. 한데 우리 식대로 몇 일을 고기 없이
식사를 했으니 그들은 일종에 ‘영양실조’에 걸린 셈이다. 자연히 생존 투쟁을
할 수밖에. 우리 관점에서 그들을 판단하고 평가하기 보다 그들 페러다임 속으로
들어가서 배려하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내 기준이
절대적이지도, 옳지도 않았다.

사막에 나무를 심는 사람들

몽골 현지인들 뿐 아니라 제 3세계에 뜻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과의 만남
또한 신선했다. 봉사 단원들은 몽골 현지의 여러 기관 방문과 강의 등을 통해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왜 하필 미국도 유럽도 아닌, 여전히 인구의
반 이상이 유목 생활을 하는 비 문명권인 몽골로 갔을까? 한국으로 따지면
연세대 정도의 명문 사립대인 울란바타르 대학을 설립하고 육성하고 있는
윤순재 총장은 말했다.
“인적 없는 몽골 초원의 들꽃은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피어 있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의미 있게 살다 죽겠다.”
KOICA 단원으로 활동하다 파견 기간이 끝난 이후에도 몽골에 남아 몽골 대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최선수 선생님이란 분도 자신의 신념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직접 만나 보진 못했지만 그를 아는 몽골 대학생들이
그에게 온갖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을 보면서, 농담처럼 서로 그와 결혼하겠다며
싸우는 여학생들을 보면서 나 또한 그 분에게 신뢰가 갔다.
그 외에도 UNV에서 일하고 있는 네팔인 자원봉사자 Nira씨, 몽골의 가난한 학생들을
데려다 무료로 가르치는 ‘밝은 미래 학교’의 최복만 교장과의 면담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회를 이끌어 가는 이들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몽골 지부 현대-기아의 김태화 대표 이사도 인상에 남는다. 그는 몽골에서
유통되는 모든 자동차의 50%를 공급하고 있으면서 향후 한․몽 관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파는 만큼 몽골 정부에도 이익이 환원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몽골의 생산성을 높이고 실업률을 낮추는 방향으로 관계가
진척되어야 한다고 힘을 주었다. 그의 기업 윤리 정신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고비 사막의 어느 즈음, 3천 여 평의 땅에 나무를 심어 놓고 약간의 채소도
기르는 게르가 있었다. 저주받은 듯 메마른 땅에 나무 그늘을 만들다니!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지금 당장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없어도, 100% 성공을
보장하진 못해도 그들은 주어진 자리에서 그렇게 맡은 일들을 묵묵히 하고 있었다.
10년 후, 100년 후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프랑스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에서 주인공 엘제아르 부피에는 홀로 황무지
프로방스에 나무를 심기 시작한다.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말이다. 결국
단 한 사람의 외로운 노력으로 황무지는 숲으로 변한다. 몽골에서 우리가 만난
또는 비록 만나 보진 못했지만 막노동 일당 2천 투그릭(약 2천원), 일반직
월급 10만 투그릭(약 10만원)이 채 못 되는 저개발국 몽골에서 언제 클지 모르는,
아니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나무를 심는 그들 모두가 엘제아르 부피에였다.
그리고 ‘한국도 못 사는데 굳이 남의 나라까지 나가서 도와줘야 하나?’라는
근시안적인 생각을 가졌던 우리도 그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나마 한국은 빈자를
도울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있지만 몽골을 비롯한 저개발국은 그렇지 못하다.
다시 말해 빈부의 차에도 차이가 있다. 때문에 한 발이라도 앞선 우리가 나가야
하고, 또 그 과정에서 서로 배우는 데 주저할 일이 아니다.

세계 여행을 꿈꾸던 한 소년이 'From Bangladesh to Finland'란 문구를 썼다면
나는 조금 좁혀 'From Mongolia to Korea‘라고 쓰겠다. 그리고 그 둘 간의 간격을
조금이라도 허물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 볼 테다.
내 가슴속에 작은 나무 한 그루를 심은 것 같은 뿌듯함을 느끼며, 물 주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If you refuse to listen to the cry of poor, your own cry for help will not be heard.
(Proverbs 21:13)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언 21:13)

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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