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생각들

9년을 기다린 친구

평화 강명옥 2002. 2. 17.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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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동안 연락이 없던 친구에게 온 메모가 전화에 남겨있었다.
"나야, 오랜만에 해서 이 전화가 명옥이 전화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의 녹음을 듣는 순간 합격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첩을 찾아 바로 전화를 했다.
예상대로 드디어 사법고시 시험에 합격했단다.

친구는 20년 전 현대그룹에 입사했을 때 만난 28명의 여자 동기생중 하나이다.
출신 학교는 달랐지만 마음이 맞아서 계속 연락을 하며 지냈던 터다.

건설에 배치되었던 친구는 일 한지 1년 만에 그만두었다.
여직원들의 텃세가 워낙 심했던 탓이었다.
어느 날인가는 여직원들에게 집단으로 린치를 당할 뻔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그만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나이 많은 여직원들에게 언니라고 부르지 않고 '∼씨라고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친구는 현대를 그만두고 나서 당시 여당이었던 민정당의 공채시험에 합격해서 들어갔다.
당시 민정당사가 인사동에 있을 때여서 가끔 점심시간을 같이 하였었다.
나는 사무실이 계동이라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친구는 성품이 단순하고 깨끗하며 사회와 국가를 위한 고민을 많이 하였다.
민정당 여성부에서 인정을 받으며 몇 년간 일했는데 그것이 부끄럽다고 하였다.
그러더니 어느 날 그런 정치적 부담이 없는 전문적인 일을 해보겠다고 하며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바로 사법시험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아프신 바람에 병간호를 오래 하게 되었고 시험공부는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다시 시작을 하였다.

친구를 생각할 때마다 늘 가슴 한 편이 무거웠다.
아주 가끔씩 만날 때마다 결심이 바뀌지 않는 것을 보고,
"그래, 언젠가는 네 꿈이 이루어질 날이 있겠지. 열심히 해라."라는 것이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이었다.

오늘이 있기까지 9년 간을 혼자 매달려 온 것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남겨준 집에서 함께 살아왔던 결혼한 여동생이 그렇게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동안 그렇게 오랜 시간 애쓰는 언니를 지켜보던 것이 힘들었었단다.

2년의 연수원 생활을 마치고 무엇을 할 지는 차차 두고 생각하겠다는 친구.
오랫동안 꿈꾸고 생각해온 일들을 차근차근 해나가리라 믿는다.
그리고 이 사회에 무엇인가 기여를 할 것이라 기대한다.

이제 잠 좀 푹 자라는 나의 말에 친구는 연수원 대비 공부를 다시 시작했단다.
그리고 계속 떨어지면 트럭운전이라도 할까 해서 따놓으려고 시도했다가 중단했던 운전1종 면허 시험에도 재도전해야 한단다.
그래서 구정이 지난 2월에야 만나기로 했다.

친구와 전화를 통화를 끝내고 난 뒤 정말 아주 정말 오래 묵은 숙제를 한 기분이 들었다.
친구가 신림동 고시원에 틀어박혀 하루 서너 시간 자며 책과 씨름하는 동안 나는 학교를 두 번이나 다니고 있고 직장을 두 번 바꿨으며 일한다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고 결혼을 하였다.

이제 친구가 일상의 작은 행복들을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Good deeds are not substitute for the good news.
(선행으로 복음을 대신할 수는 없다)

임파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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