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며 느끼며

대학생기자가 바라본 강명옥입니다.

평화 강명옥 2002. 6. 10.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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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모교의 언론홍보영상학부 학생들이 만들어 운영하는 사이트의 기자가 찾아와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본래의 모습보다 잘 표현된 것에 많은 민망함을 느끼며 옮겼습니다.



사람을 위해 걸어온 한 길 인생
- 강명옥 국가인권위원회 국제협력담당관

월드컵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한 5월말, 일본과 중국의 법조계 인사들과 민간단체(NGO)들이 한국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를 찾았다. 그들보다 앞서 설립돼 활동하고 있는 한국 인권위에게 한 수 배우기 위해서다. 그들에게 한국 인권위와 인권법을 설명하는데 앞줄에 서 있는 사람, 강명옥(44) 국제협력담당관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동북아에서 인권에 관한 한 한국은 선도적이다"라고 자부한다.

마흔 넷, 이젠 일을 정리할 나이?

국가인권위원회 10층 국제협력담당실. 창문 너머 시청과 덕수궁이 보이는 강명옥씨의 자리에는 두꺼운 파일들이 흐트러짐 없이 쌓여있고 몇 건의 서류들이 결재를 기다리고 있다. 책상 벽에 붙여 놓은 공식 회의 일정은 숨 돌릴 틈이 없다. 주인 없는 책상을 구경하던 사이, 그가 날쌘 걸음으로 다가왔다. "오래 기다렸어요? 급하게 국장님이 부르셔서…" 하루에도 몇 번씩 건물 위아래를 뛰어 다녀야 하는 그에게 구두는 사치인 듯 하다. "구두? 두 시간도 못 버텨요." 그래서 그는 발에 꼭 맞는 건강 신발을 신는다. 225m의 자그마한 신발의 끈이 풀릴 듯 말 듯 묶여있다.

국제협력담당관인 그는 국제 회의에서 인권에 관한 우리 측 입장을 밝히고 다른 나라의 입장을 수용, 전달한다. 또 각 국의 인사들과 만나면서 국제 사회에서 인권 의식을 높이는 일도 그의 몫이다. 부임 한지 이제 갓 한 달을 넘겼지만 그는 마치 이제껏 해 온 일 같다며 능숙하게 업무 보고를 하고 계획서를 쓴다. 자면서도 일하는 꿈을 꾸는 그의 지독한 일 중독증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 모양이다. 첫날부터 밤 12시를 넘기는 야근 행진을 하다 몇 일 전 과로로 꼬박 3일을 앓아 누웠어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바쁜 시간, 쉬는 시간 모두 좋다"는 그다.

"인권위로 올 때 한 후배가 40대 중반이면 이제 슬슬 일을 정리할 나이가 아니냐고 하더군요. 그 때 '어머, 내 나이가 벌써 그렇게 됐나' 하고 놀랐어요. 난 늙는 거 몰라요. 아직도 대학 다닐 때 그 마음이거든요." 재작년 연세대 정치학 박사 과정을 시작할 때도 주위에선 쉰이 다 돼서 학위 받아 봐야 뭐하냐고 했지만 그는 의연했다. "공부하는데 나이가 있나? 뭔가 할 일이 있어서 준비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결국 물 흐르듯 이 자리로 왔고." 모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학생들에게 "늘 꿈을 가져라"라고 강조한 것처럼 그 역시 항상 새로운 일들을 구상하고 실천한다. 꿈꾸는 만큼 미래는 만들어진다면서. 그리고 세상에는 할 일이 많다면서.

충전기 혹은 신의 용사

그는 82년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현대 중공업에 입사했다. 무역 업무 등을 맡으면서 "기업의 역동성과 참을성을 배웠다"고 한다. 여직원 수는 손으로 꼽던 시절, '청암회'라는 여직원 모임을 만들어 사회적으로 불리한 그들에게 힘이 돼 주려고 했다. 여걸 중에 여걸,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이었다. 하지만 과장 승진을 앞둔 89년, 사표를 썼다. 그리고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에서 국제경영학 석사과정을 밟는다. 서른 한 살의 나이에 안정된 직장을 버린 이유는 '세계 평화와 인류 복지를 위해 기여할 인재를 키운다'는 학교의 교육 목표만큼이나 순진했다. "졸업하면 서른 중반인데 그 때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도 쉽지 않다면서 저를 설득하는 교수님도 계셨습니다. 하지만 공익을 위한 일, 가능하면 국가의 일과 국제적인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91년 대학원을 졸업하고는 소망대로 공익을 위한 국가기관, 그것도 국제적인 업무를 하는 외무부 산하 한국국제협력단에 7년간 몸담게 된다. 봉사사업과장, 민간협력과장, 태국사무소 부소장 등을 역임하며 제 3세계에 봉사단을 파견하고 어려운 나라를 돕는 20여 개국의 NGO들과 협력해 세계 빈민들에게 다가갔다. 의료 봉사 활동과 국제 회의 참가를 위해 대만, 태국, 필리핀, 몽골, 케냐 등을 방문하며 30대를 보냈다. 95년 해외로 파견될 70여 명의 봉사단원들을 훈련시킬 때는 프로그램 진행에서부터 단원들 간식거리 정하는 것까지 모든 일을 챙기느라 몸이 망가지는 줄도 몰랐다. "그 때 외국어를 가르치러 온 외국인 강사들이 충전기(recharging machine)란 별명을 붙여줬어요. 저러다 쓰러지겠다 싶은데도 여전히 일한다고." 그 3개월의 훈련기간 이후 얻은 장염과 위염은 조금만 무리해도 재발한다. 하지만 그저 '조심해야지'하고 넘기는 그다.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국제이해교육원의 이삼열 원장은 작년 교육원의 기획행정실장을 맡아 의욕적으로 일하던 그를 '신의 용사'라고 정의한다.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신의 의지에 따라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강명옥씨 역시 이를 부인하지 못하리라. "평화복지대학원 다닐 때, 새벽마다 학교 근처에 있는 광릉수목원까지 왕복 2Km를 달렸어요. 그 때 숨이 가빠지면서 '아, 목숨은 순간이구나'하고 깨달았죠. 살아있다는 것, 숨 쉬는 것 자체에 감사하게 됐고.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하느님이 부르시는 자리라면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미 내 삶은 내게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지금의 자리에 올 때도 그런 마음이었다. "인권을 다루는 일, 결국은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권리를 지키는 일을 하기 위해 그렇게 오랜 시간 여러 곳에서 일하며 교육받은 것 같습니다."

내 삶은 '아이'보다 '사회'에

공부와 일에 밀려 결혼은 포기하고 있던 서른 여덟,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남편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에 생기가 돈다. 주저 없이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다"며 남편 자랑에 잠시 열을 올린다. "남편은 제가 끊임없이 새로운 걸 배우도록 자극하고 도와줘요. 남편 덕에 운전도 배웠고. 피아노나 서예처럼 그 동안 하다 만 것도 다시 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가 올 초에 완전히 단념한 것이 하나있다. 바로 아이 엄마가 된다는 것.

결혼 후 아이를 가지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아이 이름도 미리 지어두었다고 한다. 집안의 돌림자 '영'에 온갖 글자를 대입시켜 보다 정한 것이 '영중'이. 아이를 갖기 위해 그 좋아하는 일도 잠시 접었다. 이름 모를 한약도 먹어보고 쑥 뜸에 요가, 인공수정까지 시도해 봤지만 영중이는 끝에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마흔이 넘으면 임신이 어렵다지만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라고 한다.

"친정 어머니가 세상에 태어나 남는 건 자식뿐이라는 하셨을 때 내가 낳지 않아도 세상에는 돌봐 줄 아이들이 많다고 대답했는데 … 아마 세상 모든 아이들을 영중이로 보고 살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마음이 편하다는 그는 "아이가 없어서 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잖아요. 내 삶은 '아이'보다 '사회'에 있겠다 싶습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책상 벽에는 세계 어린이 1억 5천 만 명이 영양 실조로 신음하고 있다는 기사가 붙어있다.

평화 엄마,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사실 그에게는 3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이 있다. 큰아들과는 12년 차를 필두로 시집 간 막내딸과는 19년 차가 난다. 95년 모 신문사 홈페이지 채팅방에서 이야기하며 '평화가족모임'이란 이름으로 만나오다가 수양 아들과 딸로 맞아들인 특별한 인연이다. "하느님이 날 이렇게 위로하시는구나, 감사할 뿐입니다." 큰딸 이용재씨는 "어머니 뵈면서 아직 제가 해야할 공부가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여자 대통령처럼 당당하면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한결 같이 자상한 분이십니다"라고 전한다. 그의 인터넷 아이디를 딴 '평화 엄마'는 그의 또 다른 이름이다.

지난 6월 3일, 그는 지방의 한 교도소를 찾았다. 교도소 내의 인권침해와 차별행위에 관한 수인들의 진정을 받기 위해서다. 작은 응접용 탁자를 사이에 두고 50cm도 안 되는 거리에 앉아 그들의 억울한 이야기를 들었다. "천하의 흉악범이라는 생각보다는 그저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을 미워해선 안되지. 돌아오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한국국제협력단에서 유네스코로, 그리고 지금의 인권위까지 굽이 돌아왔지만 결국 '사람을 위한 한 길'을 걸어온 '평화 엄마' 강명옥씨. 남은 길을 가기 위해 건강 신발을 두둑이 준비해 놓아야 할 일이다.

정순화 기자
(http://dew.ewha.ac.kr)

We never retire from being useful to God.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에서 결코 은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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