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노라니

마무리 할 때

평화 강명옥 2003. 10. 25.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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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잔소리가 슬슬 늘기 시작했다.
'언제 논문 쓸 거야' 라는 말만 들으면 괜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작년에 박사과정을 수료한 이래로 일한다고 그리고 다쳤다고 누워지내는 동안
잊고 있었지만 늘 머리와 가슴 한구석을 누르고 있는 논문이다.

어떤 과정을 시작했으면 반드시 그것을 마무리하고 다음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모른 척 하고 지냈는데 드디어 마무리 할 때가
된 것 같다.

할 때 하지 않으면 시기를 놓치고 마음에서도 시작하기 힘드니 빨리 시작해서
끝내라는 것이 남편의 말이다.
이런 남편의 말을 네 할 일을 미루지 말고 제 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친정어머니 칠순으로 한국에 가게 되는데 좀더 머물면서 자료조사를 하고
준비를 하겠다고 결정하였다.

5년 전 남편이 가기로 되어 있던 직책에 임명되지 않았고 힘든 시절을 지나게
될 때 나는 그것을 막 박사과정을 수료한 상태에 있던 남편에게 과정을 끝내라고
하나님이 시간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나님이 시간 주시는 것이니 빨리 끝내야 한다는 내 말을 듣고 남편은 바로 종합
시험 공부를 했고 남들이 몇 년 씩 걸린다는 시험을 한번에 통과해서 교수들을
놀라게 하더니 논문도 집중해서 상당히 빠른 시간 내에 끝냈다.
그렇게 해서 남편은 그 학교 정치학과에서 제일 빨리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기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내가 남편에게 이야기한 것은 다음 과정을 나가기 위해 필요하니
논문을 정리해서 출판할 것과 그동안 일해온 경험을 책으로 쓰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학위를 받은 해에 책 두 권이 나왔고 그 해 가을 출판기념회를 할 수가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논문을 쓰고 책을 쓰는 과정에서 남편은 여러 가지를 많이
배웠고 정리할 수가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묘하게도 남편이 박사과정을 시작한 나이에 남편의 적극적인 지원에 따라
나도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한 학기에 네 과목씩 신청해서 들으라는 남편의
충고를 받아들여 힘들었지만 거의 세 학기만에 과정을 끝내서 그동안 여러 좋은
일터에서 일도 할 수가 있었다.

내가 남편이 마무리하는데 일조를 하였다면 이번에는 남편의 차례인 듯 싶다.
마무리를 미적거리며 뭉개고 있는 내게 유일하게 잔소리 할 수 있는 사람은
남편뿐이다.
날이 갈수록 이 핑계 저 핑계로 더 게을러지는 내게 이틀 걸이로 '언제 논문
쓸 건데?'라고 묻는 남편으로 인해서 한 달 여를 한국에 머무는 항공 티켓을 끊었다.

아마도 이 과정을 마치고 다음에 무엇인가 내가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는 듯 하다.


A gem cannot be polished without friction, nor can we be perfected without trial.
연마하지 않고 보석을 빛낼 수 없듯이 시련 없이는 우리도 완전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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