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노라니

혈기

평화 강명옥 2003. 10. 26.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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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어떤 일로 화가 난 상태에서 부엌 싱크대 위의 찬장을 힘껏 닫다가
유리가 깨지는 일이 있었다.
여러 조각으로 갈라져 가운데가 떨어지고 나머지는 깨진 채로 붙어있다.
당분간은 유리를 갈지 않고 그냥 둘 예정이다.
다 죽은 줄 알았던 나의 혈기가 아직도 이렇게 남아 있다니...
두고두고 회개할 일이다.

웬만한 일은 그냥 넘어가고 참는 성격이라 살아오면서 화를 낸 적이 별로 없다.
십대 중반과 후반에 크게 화를 낸 적이 있고 이후에는 거의 기억이 없는데...

중학교 3학년 때의 일.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의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집으로 몰려온 채권자들이 방을
차지하고 들어앉아 있던 때였다.
어느 날 한 중년의 여성채권자가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함께 자식으로서는 들을
수 없는 욕을 하는 것이었다.
폭발한 내가 화를 내면서 일은 일이고 사람은 사람이니 자식 듣는데서 모욕적인
언사는 삼가라고 했다.
그 여성채권자는 너무 놀랐는지 더 이상 말을 안하고 조용해졌다.
다음에 다시 온 그녀는 어머니에게 내가 한 말로 인해서 심장병이 생겨 깜짝깜짝
놀라고는 한다고 했단다.
그 다음에 나를 만났을 때 그녀는 내게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사과를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때.
시험이 있어 일찍 집에 돌아왔는데 집 앞에 동네 꼬마들이 몰려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인 막내 동생과 집에 놀러와 있던 4학년
이종동생이 같이 자전거를 타다가 택시에 치였는데 동네 파출소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 때 집안 어른들은 어딘 가로 외출을 했던 터라 집이 비어 있었다.
놀라서 파출소로 가는데 동네 아이들이 줄줄이 따라 왔다.
파출소로 들어서 보니 동생과 사촌동생은 이마와 팔에 피를 흘리면서 구석 의자에
앉아 있고 택시 기사는 경찰에게 아이들이 갑자기 골목에서 튀어 나왔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화가 날대로 난 나는 큰 소리로 경찰과 기사에 대해 퍼부었다.
지금 이것이 어른들로서 할 짓인가? 우선 다친 아이들을 병원부터 데려가야 할 것이
아닌가? 정황을 들어보니 택시기사가 잘못한 것이 분명한데 지금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것이냐?
목소리가 워낙 큰데다가 소리를 지르다보니 상당히 큰 소리가 났다.
듣고 있던 경찰이 연신 '학생 진정하라'며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그러고 있는데 집안 어른들이 달려왔고 아이들은 병원으로 가고 사건이 해결되었다.
이후에 정황을 처음부터 본 꼬마들로 인해 '명수 누나가 경찰들을 혼내줬다'고
동네에 소문이 났다.

사람을 보든 일을 보든 무엇을 보더라도 '좋은 면'만을 보는데 익숙해진 내 시각에서
화가 날 일은 별로 없었다.
늘 담담하고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이 별로 없어 인생이 심심할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닌 모양이다.
유리를 깰 만큼 내게 혈기가 남아 있다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멀었다.

자주 드나드는 부엌의 깨어진 찬장을 볼 때마다 만감이 교차한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잠언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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