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며 느끼며

조직의 쓴 맛

평화 강명옥 2001. 12. 6. 20:12
반응형
SMALL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해 일년이 지난 1983년 초의 일이었다. 부서 사람들과는 다들 우애 있게 잘 지내고 일은 잘 배워서 한창 재미있고 걱정거리가 없을 때였는데 나도 모르게 내 머리 위에 날벼락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무실 밖 복도를 지나가는데 사장실 비서(나보다 일년 먼저 입사했던)가 인사를 하면서 한마디 건네는 것이었다.


"부사장실로 가신다면서요?"

"예?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갑자기 그 비서의 얼굴빛이 바뀌면서 허둥지둥 대답도 미처 하지 못한 채 가는데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뭔가 터졌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사 초기에 비서를 하면 어떻겠느냐는 권유가 있었으나 체질로나 성격으로나 도저히 맞지않는 일이라 업무를 하겠다고 주장해서 무역 업무 부서에서 일을 해오던 터였는데 갑자기 웬 부사장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가 비교적 모든 일에 솔직하고 털털한 옆 과의 과장님에게 면담 신청을 하였다. 회사 밖의 찻집에서 '부사장실' 이야기가 무슨 말이냐는 질문에 한참 고민을 하시던 그 과장님이 이야기하신 내용은 '마른하늘의 날벼락'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회사는 여름 휴가에 100%, 가을 추석에 100%, 그리고 연말에 300%의 보너스를 지급하였는데 연말 보너스는 바로 성과급제여서 인사고과에 따라 최고 350%에서 최저 240%까지 각양 각색으로 지불되었던 터였다. 인사고과가 진행되던 늦가을에 부서 차장님이 '이번 인사고과가 참 잘 나왔다'고 지나가는 말로 알려주셔서 그런가 보다 하고 지냈는데 막상 보너스를 받아 계산해보니 240%가 나왔었다. 진작 사유를 물어봤더라면 알았을 텐데 회사사정도 잘 모르던 터라 그 해 여름 발을 삐어 일주일 이상을 병가를 냈었던 적이 있어 혹시 그 때문인가? 하고 무심코 넘어갔었다.

그 과장님 설명에 의하면 직원과 대리급을 같이 놓고 인사고과를 하였는데 고참 대리 중에 꼭 승진을 해야할 사람이 고과가 너무 낮게 나오는 바람에 승진은 고사하고 울산으로 쫓겨가게 생기는 일이 발생하였고 부장님이 신입직원인 나의 고과와 바꿔치기를 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새해가 되면서 업계에 불황이 닥쳤고 감원 대상을 골라내는데 그 기준이 인사고과였고 부서에서 제일 고과가 낮은 내가 그 명단에 올랐는데 간부회의에서 이제 들어온 지 갓 일년이 지난 대졸 여직원을 그냥 쫓아낼 수 없으니 어떻게 하느냐 의논하다가 부사장님이 그러면 자신이 비서로 쓰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들으면서 기가 막혀 말도 안나왔다. 나의 실수나 나의 능력 부족 때문이 아니라 조직의 일 처리 때문에 엉뚱한 피해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하도 질린 표정을 하고 있으니 그 과장님은 자신이 이야기했다는 것은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하였다. 이 이야기는 과장급 이상 간부들만 아는 이야기라 자신이 발설한 것이 밝혀지면 아주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난 나는 그저 하늘이 노래지고 억울한 심정에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다른 계열사에 근무하는 친구를 만나 의논을 하였다.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친구는 위로하기를 '하나님은 극복할 수 있는 시련만을 주신다는 데 능히 이번 일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와 밤새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억울한 생각만 들고 이 사실을 신문에 알려? 한 번 뒤집어 놔? 별별 생각을 다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 다음날 아침 부장님에게 찾아가 '부사장 비서'설이 도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부장님 왈, 내가 능력이 뛰어나서 발탁되었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솔직하게 일의 진척을 말했더라면 순순히 물러 나왔을텐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화가 나서 절대 부서를 못 옮기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부장님은 한술 더 떠서 '중이 절이 싫으면 절간을 떠나야지, 회사가 정책적으로 결정한 내용이 싫으면 나가야 한다'고 강변하였다. 어이가 없어서 부장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왔다.

옆과의 과장님이 내가 부장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는 바로 담당과장님에게 이야기를 하셨던 모양이었다. 과장님이 이야기 좀 하자는 것이었다. 바깥에 나가 대면하자 과장님은 작년 고과 결정 때 자신은 부장님의 결정에 반대를 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으며 너무 미안하다고 하였다. 내가 어떠한 결정을 내리더라도 할 말은 없으나 다만 처자식 달린 남자직원 한 사람 구원한 셈치고 그냥 넘어가 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을 하시는 것이었다.

과장님과의 면담을 끝내고 들어오자 차장님이 면담신청을 하셨다. 내용은 같은 것이었다. 자신도 옳지 않은 일인 줄 알면서 조직의 구조상 그렇게 밖에 할 수 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총무과장이 보자고 하였다. 일은 이미 벌어졌고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나는 나의 잘못이 없으므로 부서는 옮기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그 후 그렇게 무성하게 나만 모르고 떠돌던 나의 인사 說은 가라앉고 내게 아무 해명도 없이 설명도 없이 나는 그냥 그 부서에서 계속 근무하였다.

내가 더 이상 일을 크게 만들지 않은 것은 너무도 잘 지내고 있는 부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망가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 때 회사를 옮길 것도 생각하였었으나 여기서 이러고 나가면 패배하는 것이다 라고 결정하고 그 후 더 열심히 일을 하였다.

그리고 일년 뒤 인사고과 철이 왔을 때 차장님이 이번에 인사고과 점수가 아주 좋다는 것을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지난번에 미안했던 것을 보상하려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과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중간 300%였다. 그렇다고 높다고 하더니 왜 평균을 주었느냐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다음 해에는 어디 누가 이기나 두고보자는 오기도 발동하였고 일을 더 열심히 하였다.
결과? 차장님의 인사고과 잘 나왔다는 이야기도 또 들었고 받은 것은 똑같은 300%...아무래도 부서를 못 옮기겠다고 버틴 것에 대한 부장님의 응답(?)이었던 것 같다. 과장님과 차장님의 미안해하는 모습이란...

그리고 4년째 되던 해 회사의 일부 사업 부서를 독립시켜 회사를 만들게 되었는데 우리 업무부서의 반이 신설 회사로 옮기게 되었고 그 당시 담당과장, 차장님이 함께 옮겨가게 되었다.

그 해 겨울...나는 연말에 최고 350%의 보너스를 받았고 승진을 하였다. 승진이 결정되던 날 과장님이 불러서 말씀하셨다.

 

"그동안 너무 오래 미안했습니다. 이제야 제대로 되었습니다."

조직의 쓴맛으로 인해 벌어진 일을 수습하는데 꼬박 3년이 걸렸던 셈이다.

 

 

In Christ, the hopeless find hope.
 그리스도 안에서는 소망 없는 자들이 소망을 찾는다.
 



반응형
LIST

'일하며 느끼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흑색선전  (0) 2001.12.06
친절 그 좋은 이름  (0) 2001.12.06
GIP 입학시험(1)  (0) 2001.12.06
GIP 입학시험(2)  (0) 2001.12.06
진로 (1) : 한국국제협력단  (0) 2001.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