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며 느끼며

그 때 그 시절 - 명함파동

평화 강명옥 2001. 12. 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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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를 정리하면서 책상 서랍에 보관되어 왔던 명함들을 정리하였다.

남편이 20 여년간 사회 생활을 하면서 받았던 명함 50 여 갑, 내가 16 년 간 사회생활을 하면서 받은 명함 10갑(나는 중간에 직장을 한번 옮겼을 때 기존 명함을 다 정리했던 터라 남편에 비해 양이 적었다)을 버리는데 하루 저녁을 다 썼다.

오랫동안 보관해왔던 명함을 버리고자 결심했던 것은 필요한 명함은 주소록에 다 있고 그 명함들은 꺼내 볼 일이 없이 서랍 공간만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받을 때 다 일로서 받았고 준 사람의 인격이 담겼다고 생각하니 그냥 버릴 수가 없고 혹시 잘 못 사용될까봐 일일이 손으로 찢다가 나중에는 가위로 귀퉁이를 조금씩 오려서 버렸다.

그 명함들에 남편과 나의 일한 세월들이 담겼다고 생각하니 여러 가지 감회가 떠올랐다.
그러면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벌어졌던 명함파동(?)이 떠올랐다.

1982년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 업무부에 입사했을 때의 일이다.
대학을 졸업한 여자를 처음으로 공채로 뽑았던 그 기업은 당시 3000여명의 남자사원과 30여명의 여자사원을 뽑아 같이 교육을 시켰고 여사원들을 각 계열사에 2명씩 배정을 했었다.
대졸 여사원의 입사는 각 계열사마다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고 많은 에피소드와 문제가 일어나게 만들었다.

명함파동은 그 중의 하나이다.
입사 며칠 후 담당대리가 명함을 신청하라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신청서를 작성해서 총무과에 제출을 했었다.
3-4일이 지난 후 퇴근 직전에 나를 찾는 전화가 왔었다. 아직 전화번호를 알려준 데가 없는데 누가 나를 찾는가 궁금해하며 받았더니 총무과 여직원의 전화였다.

내용인즉슨 명함을 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유가 무엇이냐 물었더니 회사 창립 후 몇 십 년 동안 여직원에게 명함을 만들어준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여직원이라 줄 수 없다면 4급 직원(대졸직원의 자격이 4급이었다)의 자격으로 달라고 했다.
뒤에서 전화 내용을 듣고 있던 담당대리는 즉시 총무과로 달려갔고 직원들에게 강명옥씨는 여사원이 아니라 4급 직원이라고 강변하고 돌아왔다.

이윽고 퇴근시간이 되어 탈의실(모든 여직원이 유니폼을 입게 되어 있었다)에 들어갔더니 여직원 몇 명이서 모여 앉아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서로 인사를 나눈 것도 아니기에 묵묵히 옷을 갈아입고 있었는데 귀에 선뜻한 단어들이 들렸다.

"지가 뭔데 얼마나 버티는지 두고보자"
그 다음 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바로 나더러 들으라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등골이 써늘해지면서 문제가 터져도 크게 터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사무실에 들어가 내게 전화를 걸었던 여직원에 대해 물어보니 나보다 한 살 위인 들어온 지 5년이 된 고참 여직원이라는 것이었다.
책상 자리가 어디인지 확인하고 집에 돌아와 밤늦게까지 고민을 하였다.

결론은 정면돌파하자는 것이었다.
진심을 담아 편지를 썼다.
'나는 이제 사회생활이 처음이고 누구나 회사에 입사하면 명함을 받는 것으로 생각했다.
더욱이 담당대리의 지시에 의해 신청을 했는데 남자가 아닌 같은 여자 직원이 나의 명함 내주는 것에 반대를 했다는 것이 무척 서운하다.
나는 모두와 잘 지내고 싶다. 도와달라'가 나의 서신 요지였다.

아침에 일찍 출근하여 그 여직원의 책상 위에 편지를 놓고 왔다.
업무가 시작되고 1시간쯤 지나서 바로 그 여직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야기하자고... 여직원들이 커피를 준비하는 작은 방이 있었는데 거기서 비교적 오랜 시간을 이야기하였다.

마침 그 여직원도 사회생활을 어느 정도 한 터이라 그리고 성격도 상당히 직선적이고 솔직하여 이야기가 잘 끝났다.

사실 자신이 자격지심이 들어 대졸여사원의 존재가 신경에 거슬리던 판에 명함신청이 들어와 심술도 났고 해서 퇴짜를 놓았는데 담당대리까지 나의 역성을 들어 난리(?)를 피우는 것이 너무 미워서 그랬다는 것이다.

자신이 잘못했고 앞으로 잘 지내자고 선선히 사과를 하는 바람에 크게 번질 뻔했던 명함 파동은 가라앉았다.
그 후 약 한 달이 지나서 내 이름 석자가 박힌 명함을 받았을 때의 감격(?)이란...

이후 부서가 바뀌고 승진을 하고 하면서 나의 명함도 여러 장으로 늘었고 다시 직장을 두 번 정리하고 새로 시작하는 동안 그 숫자는 더 늘고 있다.

자신의 일이자 얼굴인 명함들을 명함첩에 한 장씩 기념으로 정리를 하고 미처 다 쓰지 않고 남겨졌던 명함들은 다 버렸다.
나의 주요 역사를 정리한 셈이다.

앞으로 더 몇 장의 명함이 늘어날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다.

 

 

When we find Christ, we discover that
we were the ones who were lost.
우리가 그리스도를 발견했을 때 길을 잃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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